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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약한 영웅’은 전형적인 모범생 시은이 같은 반 학생, 수호와 범석을 만나면서 폭력에 대응하는 학원 액션물이다. 평소 시은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일진 무리가 시은의 약점(성적)을 자극하면서 일이 벌어진다. 한마디로 보이지 않지만(혹은 안 보이는 척 외면해 왔지만), 분명히 존재하던 결핍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본편에서 유독 눈에 띄는 미장센이 있다면 ‘현수막’이다. 교문을 지나가는 인물의 머리 위로 인물의 상황과는 대비되는 형식적인 문구들, 그리고 이를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부감)의 카메라가 더해지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결핍이 한 쇼트 안에 압축되어 담긴다.
'학생이 행복한 학교, 교사가 즐거운 학교'
이 짧은 문구의 이면에는 학교에 만연한 폭력과 이를 묵인하는 어른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2022학년도 벽산고등학교 대학 합격 현황 서울대 3명...'
‘약한 영웅’의 오프닝은 벽산고의 대학 합격 현황을 자랑하는 현수막이다. 이 문구는 첫 회에 등장하고 마지막 회차에서 재등장하는데,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 문구를 읽고 반응하는 관객의 인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은의 여정을 지켜본 관객은 너무나 익숙하게 마주했던 이 문구가 새삼스레 낯설고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공부 외에 중요한 것은 없었던 시은에게, 지켜주고 싶은 ‘수호’라는 존재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이 세계의 가장 큰 특이점은 ‘어른들의 부재’다. 학교에는 아이들을 인도해야 할 선생님이, 가정에는 관심과 사랑을 줘야 할 부모님이, 사회에는 시민을 지켜줘야 할 경찰이 부재한다. 소동이 벌어진 뒤에 도착하는, 언제나 한발 늦는 어른들은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결코 구해주지 못한다. 아이들의 상황과 모순되는 현수막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른들의 위치 그 자체다.
어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늘 아이들이 아닌 자기 자신의 안위를 향해 있어서, 말 본연의 쓸모를 잃어버리고 만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힘겹게 싸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을 구해줄 영웅(어른)을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영웅이 되기를 택한다.
이 드라마는 어쩌면 ‘약한 영웅’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부재한 세계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영웅의 위치로 밀려나는 아이들. 서로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내야만 하는, 다치고 깨지고 무너질지라도 맞서야 하는 약한 영웅들. 이는 아직 알에서 나오지 못한 유약한 존재들의 몸부림이자 생존 전략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본들, 당장 어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시은의 차갑고 퉁명한 표정 뒤에는 상처받기 싫어서 밀어내는 아이가 있고, 범석의 웃는 얼굴 뒤에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이가 있다. 또래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수호의 당당한 표정 뒤에는 책임감에 짓눌린 어린 가장이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약한 영웅이 되어야 했던 이들은 모두 ‘뭔가를 제대로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이 부족해서 서툴지만 원초적이고 순수한’(유수민 감독, 씨네21 인터뷰) 아이들일 뿐이다.

시즌1의 결말에서 수호는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었고, 범석은 해외로 떠났으며, 시은은 혼자 남았다. 서로를 지켜주는 ‘영웅’이 되고 싶었으나 필연적으로 ‘약한 존재’였던 아이들은 결국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한 채로 바닥에 떨어진 꼬마가 되었다.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시즌2의 오프닝, 시은은 이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노라 말한다.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어른 말이다. 이 선언은 반대로 시은의 내면적 결핍과 이 세계의 구조적 결핍을 동시에 드러내며, 시은이 세상에 맞서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다만 시즌1과 다른 점이 있다면 결정적인 순간, 시은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고 했던 시은은 새로운 학교(은장고)에서 친구들을 만나며 비로소 도움을 청하고, 타인을 믿는 법을 배운다. 이를테면 준태가 시은의 뒤를 지켜주고, 후민과 현탁이 나서서 시은을 도와주면 연합의 두목, 백진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영리한 두뇌와 강력한 신체적 능력을 가졌던 백진조차, 약한 영웅들의 동맹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된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유수민 감독, 씨네21 인터뷰) 백진과 시은의 결말이 이토록 판이한 이유는 간단하다. 백진은 혼자였고, 시은은 함께였다. 모든 일을 홀로 해결하는 전능한 히어로는 이곳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영웅이란 모든 책임을 홀로 감내하는 일인자가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고, 친구를 믿는 용기를 지닌 인물이다.
“넌 잘못한 거 없어”
각자의 위치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기다리던 아이들,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약한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러니 혼자이기를 선택하지 말기를,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를 또 한 명의 약한 영웅들에게 간곡히 요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