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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빛나는 순간


 

얼마 전 화제작 ‘아노라’를 봤다. 더 이전엔 ‘함넷’도 봤다. 케냐까지 와서 할리우드 아카데미 수상작만 골라 보고 있자니 참 우습기도 하다만, 숏폼의 풍파 속에서 흐려지는 ‘취미’라는 개념의 명목을 이으려는 나만의 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영화가 좋다.

 

스크린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찰나가 여전히 사랑스럽고, 인물의 서사를 박차고 튀어나오는 감정의 고조에도,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관조하는 렌즈 속 풍경에도 가슴이 설렌다. <바빌론>을 보고 나왔던 그날, 씰룩대는 입꼬리와 함께 울렁였던 나의 솟구치는 마음을, 싱숭생숭한 가슴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었던 캠퍼스의 중앙 광장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의 나는 ‘순간’의 사이에서 허우적댄다.

 

빛나는 장면들을 잇기란 왜 이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쫄아드는 나의 '순간'이 걱정돼


 

하나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몇백 번의 컷과 수천 명의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내 인생의 좋은 순간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도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 건 퍽 당연한 법칙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늘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당연하고도 차가운 진실이지. 나는 그 노력의 형태를 걱정하는 중이다.

 

순간에 매료되는 사람에게 전후의 기나긴 여정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인생이란 뭐, 짧은 행복으로 긴 고통을 견디는 것이라고들 하니까. 문제는 나의 그 ‘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이다. 바야흐로 숏폼의 시대, 내 집중력과 시야도 함께 쪼그라드는 듯하다.

 

심각성을 알아챈 건 좋아하는 예능을 다시 볼 때였다. 분명 예능 플랫폼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통으로 다시 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유튜브로 넘어와 가장 재미있는 장면을 짤막하게 편집한 버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시간짜리 영상을 견딜 수 없어 30분짜리를 보고, 30분도 길어 10분, 이러다간 이 10분도 길다며 숏폼 영상만 보게 될 미래가 선해 소름이 쫙 돋았다. 이대로는 안 돼!

 

내게 무언가 길게 생각할 거리가 필요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를 생각 의자에 앉힐 무언가. 너무 무거워 나를 마냥 착잡하게 만들면 안 되고, 그렇다고 다른 즐거움으로 해찰할 정도로 가볍기만 해도 안 됐다. 적당한 강제성과 흥미를 둘 다 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도전과 만용의 어드메 


 

대뜸 스페인어 어학 시험을 등록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생돈을 들여 등록한 시험이면 내 돈이 아까워 공부를 열심히 할 것 같았고, 스페인어는 어차피 학부 졸업을 위해 필요한 요건이니(우리 학부는 졸업을 위해 초·중급 외국어 수업을 들어야 한다) 필요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외국어 공부는 예전부터 좋아하던 일이니 즐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칠만 원이 쑥 나갔다.

 

그렇게 등록한 지 벌써 몇 달은 지난 것 같은데, 내 스페인어는 허무하게도 제자리걸음이다. 변명이야 많다. 일이 바빴다. 업무가 나를 파도처럼 쓸고 지나갔고, 집에 오면 늘 녹초가 되어 숏폼의 삶도 겨우 살아냈다. 아잇, 그래도 틈틈이 공부할 수 있었는데. 지나간 시간은 늘 아쉽다.

 

후회한들 어쩌리오, 흘러간 시간을 잡을 수는 없으니. 기왕 시험이 코앞에 닥친 것, 벼락치기를 기회 삼아 내 인생의 순간순간을 좀 길게 늘여봐야겠다. 일종의 집중력 재활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한 도전이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으로 밀고 나가야지. 3주 후 돌아오겠다.

 

롱폼의 삶 도전기, 오늘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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