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이 좋을까, 나에게 성큼 다가올 앞으로의 시간이 어떤 감각을 선사해 줄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는 게 선책이지 않을까 싶다가도 금세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누워만 있어도 복이 안착해 생계 책임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버킷리스트’라는 단어는 무수히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희망에 잠기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 내던져지는 것처럼 막중한 부담을 안겨 주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아서 매번 장래 희망이 바뀌기도 하고, 365일 갈대 같은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어린 나이의 아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그런 총체적 상상의 희망들 말이다.
물론 지금도 사뭇 다르진 않다. 어렸을 적과 마찬가지로 이루고 싶은 것도 많고, 오히려 대학에 진학한 후 하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피어나 끝없는 고민으로 밤잠을 뒤척이게 한다. 큰 걱정인 것은 이루고, 하고 싶은 것은 넘쳐나는데 정작 실행 과정으로 옮기는 것을 힘겨워한다는 것이다.
많은 일을 벌여놓고 결정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금방 싫증이 나버려 꿈꾸는 과정을 번복하기 마련이다.
어렸을 적 나는 ‘버킷리스트’를 생과 사의 경계라고만 여겨, 웅장한 일이나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대단한 꿈만을 적어놓고 망상하곤 했었다.
그러나 버킷리스트는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나 자신‘에 가까운 것, 나와의 진정한 대화를 통해서 나의 진심에 조금 더 돈독히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죽기 전’이라는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말에 무조건 신경을 올인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프로젝트를 통해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토대로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일지, 원하고 소망하는 삶의 방향,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들에 대해 깊이 고심해 본다. 겨울잠처럼 깊이 숨어 있던 내 마음을, 봄날의 온기가 가만히 두드려 깨우는 듯하다.
어린 시절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제멋대로 어른이 된 나를 상상하곤 했었다. 굉장히 달콤한 감각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인간의 뇌는 상상만으로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어 가슴 벅찬 선물을 받을 생각에 기대감이 빠르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막연하게 꿈꾸었던, 20대 중반이 된 나는 많은 소원을 성취한 어른이었다. 사랑도 재물도 직업도, 어려움이 있어도 당당히 마주하고 전진할 수 있는 그런 단단한 사람.
그중 하나는 나만의 집을 갖는 것이었다. 혼자만의 집, 혼자만의 생활. 어린 내게 그것은 이유 없이 낭만으로 번져오곤 했다. 부모님에 대한 의지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는 삶은 지속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고,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혼자 정적인 시간을 보내는 언니, 오빠들을 바라보면 근사하고 진정한 어른처럼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대로 집 꾸미기"
어렸을 적 소망을 고스란히 담아 ... 먼 훗날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는 날이 오면, 내가 사랑하는 취향들을 마음껏 담아 나만의 집과 방을 꾸며보고 싶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같은 수많은 SNS 속 사람들의 방 꾸미기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아직 물들지 않았던 그 시절, 생기롭게 반짝이던 나의 눈빛이 문득 떠오른다.
좋아하는 것도 많고 변덕이 심하여, 취향이라는 영역은 쉽게 자극받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조금씩 매 순간 바뀌는 편이라 일관되지는 못하지만, 나만의 공간,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는 것 같다. 내 손길이 닿고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그런 공간. 집이라는 공간은 떠올리기만 해도 안정감을 주니까.
“그리스 산토리니 방문하기”
웬 뜬금없이 그리스 산토리니인가 싶지만, 동심의 영향인가 문득 산토리니를 생각하면 여러 색채가 섞인다기보다 흰색과 푸른색이라는 일관된 색상으로 나열된, 그렇기에 심리적 안정을 주는 한결같은 공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낭만적인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일까, 실제로 방문한다면 막상 그만큼의 감격이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저 무궁무진한 공상만이 남는 것일까.
그러므로 더욱더 산토리니 풍경을 직접적으로 보고, 느끼고 싶다. 실망하게 될지 아니면 감격하게 될지, 어렸을 때 근심 없이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하곤 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사소한 위로를 전해주고 싶다. 그날 이후로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고 또 많은 제약을 건너 나는 산토리니에 도착했다는 것을!
과연 감동할 수 있을까? 내 마음에 자그마한 변화를 줄 수 있을 만큼 큰 영향력을 지닐까? 간혹 꺼내보는 상상이지만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혼자 여행 떠나보기”
산토리니를 찾아가는 일도 그렇지만, 그리스는 한국과 멀리 떨어진 유럽의 낯선 땅이기에 그 거리만큼이나 심리적인 부담과 두려움도 크게 따라온다.
언젠가 용기를 내 홀로 그곳을 찾겠다는 다짐을 쉽게 꺼내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산토리니가 아닐지라도, 아주 가까운 지역일지라도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굳건하다.
어릴 적 내가 떠올리던 ‘진정한 어른’의 모습에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이 아닌 홀로 떠나는 여행이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친구와의 여행이라는 작은 도장을 이미 찍은 지금, 다음번에는 기필코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해 떠나보고 싶다.
사실 덜렁거림, 약간의 소심함은 내 성격적 결함이다. 이러한 단점의 부각으로 홀로 여행은 매번 미뤄두거나 마음속에 고스란히 모셔둔 보물 상자와도 같았는데 이제는 무조건 실행, 정말로 실행만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조금은 당혹스러운 일이 있어도 힘겨운 감정이 머릿속을 잠식하더라도 홀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고 싶다, 국내 여행이라도. 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이나 한국의 남쪽 부근이 가장 좋을 것 같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나의 은은한 일상에서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가능하면 긍정적인! 파도와도 같은 경험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상적인 사랑을 시도하기”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했지만 막상 내가 적어 놓고도 ‘이상적’이라는 의미가 무엇일지 한참 들여 보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법한 극적인 사랑인가,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그렇지만 능력치를 최적화하여 누릴 수 있는 궁극의 사랑인가. 물론 여기서 내가 언급한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에 국한한다.
나는 애초에 우정, 우애 등 성별과 상대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사람이 갖는 모든 애착이 사랑에 내포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사랑이란 무한한 속성이며 한계점 또한 없다.
떠오르는 모든 것이 사랑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를 영원히 갈구하고, 이룰 수 없음에도 목을 매달고 죽음에 가까운 고통마저 마다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우리의 현재도, 지금껏 보았던 선조들의 역사도 모두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내가 언급한 ‘이상적‘인 사랑은 결코 동화 같은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는 공상 세계에서 그릴 수 있는,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사랑이기에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소비되고 그려지고 감미로운 꿈이 된다.
이런 사랑을 바라는 마음 자체가 어쩌면 무모하고도 위험한 일일지 모른다. 자칫 평생 홀로 남겨진 비련의 주인공처럼 스스로를 여기며, 자의식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버리게 될 것 같다. 가만히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늘 내 곁을 맴돌고 있다는 걸 안타깝게 알아채지 못하고.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평생의 복과도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이상적 가치가 여기 있다. 돌아갈 수 있으며 버틸 수 있는,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리며 아픔과 시련을 함께 짊어진다는 것. 서로에게 가까이만 다가가는 것이 아닌, 서로를 오랫동안 마주하고 먼발치를 내다보며 같은 방향으로 한 걸음씩 옮기게 할 수 있는 누군가.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준다는 것과 희생을 감내한다는 것 사이의 깊은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이상적인 사랑이 허락하는 진짜 기쁨에 닿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