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홀로 서 있다. 이전에 '당신은 홀로 설 수 있나요'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던 기억이 나, 다시 살펴보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구나. 남길 것은 남기고, 달라질 것은 달라지고 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항상 홀로 서 있다는 사실도 조금씩 낡고 변해간다. 오랫동안 홀로 서 있으면, 홀로 있다는 마음마저 감색되거나 윤색된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누우면 방 한 칸이 내 몸 위로 쏟아진다. 혼자서 가만히 방 안의 독백 같은 전경을 바라보면 글자들은 죄다 사라지고 표정만 눈에 밟힌다. 내 방의 표정은 이런 것이다. 표정들이 하도 다양하여 나를 오히려 어색하게 만드는 방이다. 방뿐이겠는가.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방이 점차 낯설어지고, 나는 방을 사사하기 시작한다. 이 방을 벗어나도 바깥의 잔등이 내 방 안의 불빛보다 밝지는 않다. 생각이 좁아지면 그만큼 은밀해진다.
무릇 물체들, 그것들이 사람을 '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정리하고, 그 틈에서 살고 있다. 그것들은 유용하다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짐승들인 것처럼 그 물체들과 접촉을 갖는 게 나는 두렵다. 이제 생각이 난다.
- 장 폴 사르트르, <구토>, p.27
로캉탱이 구토를 시작한 순간, 내 방 안의 온갖 물체들 역시 그의 구토를 표상하겠다는 일념을 나에게 드리운다. 어두워진다. 어두워지면, 청각이 가장 예민하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처럼 귀에는 눈꺼풀이 없고, 몇 번을 곱씹어도 그것은 불행이다. 소리치고 싶어진다. 그에게 무어라 항의하고 싶다. 그런 것이라면 나를 방 안에만 있도록 해달라고. 다른 무엇이라도 내다버리고 올 테니 나를 그런 사람으로 남겨달라고.
바깥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데 방이 자꾸만 내 등을 민다.
실체가 없는 것들이 요란하다. 글을 쓴다는 일도 말의 수고로움을 덜어준다고 생각하면 다행이겠으나, 어딘가 요란한 구석이 있다. 나의 글은 나와 함께 있지는 않으나, 혼자는 아니다. 내가 혼자일 때에도 나의 글이 혼자가 아님은 큰 다행이다.
이 낯선 방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소리들이 함께 있다
나는 세계의 가구들 중 하나로서 작은
소리를 내어볼 뿐이다
문간의 옷장은
문 밖의 냉기와 방 안의 온기
사이에서 툭,툭, 몸을 조율한다
내가 방금 앉았다 일어난 소파는
눌렸던 몸을 회복하느라 퍽, 하면 다시
부풀어오른다 보일러관의 끓는 물이
휘, 휘, 내 몸 안으로 흘러든다
이 낯선 방에 엎드려
나는 두 복숭아뼈나 부딪치며
생각한다 모든 존재의 소리는
삐걱거림이라는 것을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서 수축과 팽창, 단절과 소통
사이에서는 흐르는 물조차
삐걱거린다는 것을
삐걱거리는 몸만이
그 소리 들을 수 있다는 것을
타악기 연주자 이블린 글레니는 여덟 살 때 귀를 잃었지만
벽에 반사된 소리의 진동을 통해 존재의 음악을 들었으리라
- 나희덕, <소리들> 전문
숨죽일 필요 없이 삐걱거리려면 홀로 있어야 한다. 홀로 서 있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내가 방금 소파에 앉았다 일어난 순간, 소파의 감정이 내게로 옮아갔고, 나는 이제 소파와 다르지 않다. 홀로 있다는 마음이 소파에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것이 매번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는 일. 집중해서 듣는 일. 음악을 듣는 일. 눈꺼풀이 없는 귀로 음악에게 내어주는 일. 음악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음악을 듣는 일.
윌리엄 포크너는 "순수한 음악으로 표현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나의 재능은 언어에 있기 때문에 엉성한 언어로 표현하려 애써야 한다"고 말했다. 엉성한 언어, 엉성한 소리.
방이 낯설어질 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익히 나의 손을 잡아주었던 것들의 고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