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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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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월 1일이면 떠나간 장국영을 기리며 재개봉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천카이거 감독의 작품, ‘패왕별희(霸王别姬)’다.

 

‘패왕별희(霸王别姬)’는 초나라 패왕(霸王) 항우(项羽)와 그의 연인 우희(虞姬)의 마지막 이별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영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이 비극적인 무대 위 패왕과 우희, ‘돤샤오로우’와 ‘청뎨이’의 삶을 조명한다.

 

샤오로우와 뎨이는 어릴 적부터 함께 경극단 생활을 하며 패왕과 우희로 자란다. 다만 샤오로우에게 극 속의 우희는 뎨이지만 현실의 우희는 매춘부이자 아내인 쥐셴이다. 하지만 쥐셴과 뎨이의 패왕은, 언제 어디서든 샤오로우다. 패왕과 우희의 역할을 극에만 한정 짓는 샤오로우와 다르게, 뎨이에게는 삶 그 자체가 극이고 극 자체가 삶이다.

 

우희는 한평생 패왕이 필요했다.

 

 

 

모자라지 않은 '한평생'의 의미




청뎨이: 우리 평생 함께 노래하면 안 될까?

돤샤오로우: 반평생이나 함께 노래했잖아.

청뎨이: 아니! 평생을 함께해야 해. 일분일초라도 모자라면 한평생이 될 수 없잖아.

돤샤오로우: 너, 정말 경극에 푹 빠졌구나. 경극 속에서야 함께 있지만 현실에선 그게 아니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뎨이에게 삶과 극 사이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경극과 얽힌 삶을 살기도 했지만, 뎨이가 스스로 패왕을 위한 ‘우희’가 되기를 선택한 시점부터 현실과 무대의 구분은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삶이 곧 경극이었던 그에게, 패왕을 향한 우희의 마음은 단 한순간도 거짓인 적 없었다.

 

 

돤샤오로우: 어쩌겠어, 이게 현실인데. 네가 그랬잖아. 경극은 계속돼야 한다고. 너도 이제 정신 차려 현실에 맞춰 살아야지! 내 말대로 한 번만 굽히면 안 돼? 누가 뭐래도 난 패왕이고 넌 우희야.

청뎨이: 근데 마지막엔 우희만 희생되지.

돤샤오로우: 뎨이, 너 정말 경극에 미쳤구나. 그건 극일뿐이야!

 

 

뎨이의 제자 샤오쓰가 뎨이의 우희 역을 빼앗아갔을 때, 무대 뒤 패왕을 위한 분장을 사람들은 서로 떠맡기며 회피한다. 쥐셴 또한 분장을 들고 머뭇거리지만 그것을 가져가 패왕의 머리에 직접 씌워준 사람은 바로 뎨이다. 이 분장은 훗날 문화대혁명 당시 조리돌림을 당하는 패왕 샤오로우의 손에 의해 불 속으로 던져진다.

 

 

 

우연이 아닌 업보




쥐셴: 너무 두려워. 높은 건물에 서 있는 꿈을 꿨어. 사방은 온통 구름이었지.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돤샤오로우: 내가 받아줄 테니 뛰어내려.

쥐셴: 거기에 당신은 없었어. 당신은 없었어... 샤오로우, 날 버리면 안 돼.

 

  

하지만 샤오로우는 문화대혁명 속에서 쥐셴을 버린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끌려간 경극단원들은 대중 앞에서 조리돌림을 당한다. 분장을 하는 샤오로우를 향해 뎨이는 망설임 없이 우희의 모습으로 다가간다. 이미 뎨이의 분장은 완성되어 있다. 우희는 여느 때처럼 패왕의 분장을 돕는다. 하지만 결국 샤오로우는 쥐셴과 뎨이를 버린다. 자신을 위해 희생해 온 뎨이를 아편쟁이, 매국노로 몰아가고, 쥐셴은 매춘부였음을 욕한다. 동시에 두 우희를 버린 것이다. 우희는 버림받은 서로를 지켜본다.

   

 

청뎨이: 모두 날 속였어... 나도 비판하겠어. ‘목단정’이고 경극이고 다 비판하겠어... 이 모든 일은 우연한 게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우리가 이런 지경까지 한 걸음씩 걸어온 거야. 자업자득이지! 내 인생은 원래 엉망이었어. 하지만 패왕 너까지 무릎 꿇고 빌다니, 경극은 정말 끝이야. 아무것도 안 남았어. 업보야...

 


경극의 끝은 패왕이 무릎을 꿇는 순간이다. 우희의 운명은 패왕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샤오로우는 너무나도 자주 무릎을 꿇는다. 고개를 숙이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항복한다.

 

이 모든 일은 우연한 게 아니라는 뎨이의 말은 사실이다. 단 한순간도 그가 샤오로우를 위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우연이 아닌, 매 순간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선택한 계획된 희생. 엉망진창인 삶 속으로 스스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간 자는 결국 뎨이 자신이다. 뎨이는 모든 것을 비판하겠다 절규하며 결국은 자기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낸다.

 

쥐셴은 샤오로우가 불 속으로 던져버린 검을 조리돌림을 당하는 수모 속에서도 끝내 지켜내어 뎨이에게 전해준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우희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이후 쥐셴은 샤오로우와의 결혼식날 입었던 붉은 옷을 꺼내 입고, 신발을 벗은 채 스스로 목을 맨다. 문화대혁명의 화를 피하기 위해 태우려다 간직한 옷. 샤오로우에게 두려움을 표하며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할 때 입은 그 붉은 옷. 과거에 태우지 못한 그 옷은, 우희의 마음이 까맣게 타버린 뒤에야 비로소 주인과 함께 유명을 달리한다.

   

 

 

인생의 소품, 장 내관의 '검'


 

 

돤샤오로우: 이 검만 있었으면 난 황제가 되고 넌 왕비가 되었을 거야.

청뎨이: 내가 그 검을 가질 수 있게 해 줄게.

나쿤: 얘들아, 조심 좀 해라. 이건 진짜 검이야.

 

 

한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울려 퍼지니

... 군주의 기세가 다하였는데 애첩이 어찌 살길 바라겠습니까.

위안스칭: 조심해요, 진짜 검이에요.

 

 

장 내관의 ‘검’. 그 비극적 서사의 시작은 어린 시절, 뎨이와 샤오로우의 대화였을 것이다. 이 검만 있으면 서로가 패왕과 우희로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 뎨이는 어쩌면 그 검으로 언젠가 자신의 목을 벨 날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검은 돌고 돌며 주인을 바꾸지만, 뎨이에게 검이 가지는 의미는 늘 같았다. 패왕과 우희를 지켜줄 존재. 그 검만 있으면 샤오로우과 자신이 영원할 거라는 믿음이 영원했을까? 검을 거쳐간 주인들은 모두 파멸했다. 장 내관은 파산 후 담배상이 되어 길거리에 나앉았고, 위안스칭은 공산당 집권 당시 반혁명분자로 몰려 조리돌림을 당하고 최후를 맞이한다. 검의 주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뎨이가 자신이 검을 쫓을수록 비극의 심연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가게 될 것임을 몰랐을 리 없다. 인생의 소품인 그 검이 자신의 삶이라는 경극에 비극을 가져올 것임을, 뎨이는 분명 알았을 것이다.

 

 

 

'우희'가 스스로 정한 마지막




돤샤오로우: 이 몸은 비구니요. 꽃다운 나이에 -

청뎨이: 사부님께 머리를 깎였네.

돤샤오로우: 이 몸은 본래 사내로서

청뎨이: 계집도 아닌데

돤샤오로우: 틀렸어, 또 틀렸어!

청뎨이: ... 이 몸은 본디 사내로서 계집도 아닌데

...

자, 우리 다시 해보자.

 

...

 

마마, 어서 검을 주소서.

가당찮소.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어디?

 

...

 

돤샤오로우: 뎨이!... 더우쯔...

 

 

11년만에 만나 22년만에 함께 경극을 하는 샤오로우와 뎨이.

 

어린 시절부터 뎨이는 사내와 계집을 바꾸어 부르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내용을 따라 자신을 계집이라고 칭해야 하는데, 스스로를 계속 사내라고 불러 곤란한 상황을 맞기도 한다. 극장주인 나쿤이 장 내관의 분부로 경극단을 찾아왔을 때에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 샤오로우가 뎨이의 입을 담뱃대로 쑤신다. 그 이후부터 뎨이는 스스로를 계집이라고 칭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순간에 뎨이는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자신이 우희가 아닌 ‘사내’라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 삶의 부정일까. 한평생을 우희로 살아온 뎨이의 ‘경극’이 결국 진짜가 아니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자신이 사내임을 인정하는 그 순간, 뎨이는 진짜 ‘우희’가 되어 스스로 목을 벤다. 그는 자신이 계집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자신’을 되찾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가장 자신답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우희’로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강요된 우희의 역할이 아닌, 자신이 직접 결정한 진짜 ‘우희’의 모습으로.

 

   

 

'한평생' 진심이었을 뎨이의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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뎨이를 아편 중독에서 빠져나오게 한 샤오로우는 그를 아편쟁이로 고발하고, 언제나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해왔던 쥐셴을 매춘부라 낙인 찍으며 버린다.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울 때는 언제나 우희를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패왕을, 우희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

 

패왕을 향한 마음은 우희에게 의무였고, 곧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진심’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강요된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칼을 뽑아든 것은 오로지 우희, ‘뎨이’의 의지였다.

 

조명 아래 마지막 경극을 벌이는 샤오로우와 뎨이. 뎨이의 표정은 오묘하다. 삶 자체가 경극이었던 그에게 모든 감정은 마음만 먹으면 갈무리할 수 있는 연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샤오로우를 향한 그의 마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꾸밈없던 진실이었다.

 

강요된 희생과 역할 속에서 ‘한평생’ 진심이었을 뎨이의 마음. 시대와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을 그들의 ‘패왕별희(霸王别姬)’.

 

그렇게 패왕 항우와 우희는 이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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