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반대말은
한 단어를 해부하는 일이 막막할 때 가장 반대에 있는 말을 떠올리면 머릿속에 기다란 선이 생긴다. 가느다랗고 보이지 않게 끝까지 이어져 있는 그런 선. 높고 낮은 것, 작고 큰 것, 쓴 것과 단 것, 날 선 것과 무딘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어린 것과 늙은 것,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길다란 선.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선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나를 따라온다. 삶과 연결되는 길다란 선을 당기다 보면 끝에 죽음이 묶여 있다. 우리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무뎌지려면 날카로운 걸 알아야 하고, 늙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을 지나야 하고, 알기 위해서는 모르는 상태를 거쳐야 하는 것처럼 죽음을 이해하려면 삶을 알아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둘은 떨어질 수 없다.

<나는 졌다 – 나의 탄생>
엄마는 나를 처음 안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문득 두려웠던 적이 있다. 내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무사하다 안도했을까. 함께 있던 사람들과 나에게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는 말을 나누었을까. 그 축하에는 정말 안도와 사랑만 깃들어 있었을까. 내가 숨을 쉬는 그 순간부터 엄마는 내게 죽음을 물려준 것이라는 건 알았느냐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언젠가 내 품 안에 안기게 될 어떤 아이를 상상하며, 내가 그 애를 처음 보고 그 아이의 죽음을 떠올릴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를 계속 슬프게 했다. 우리는 생일은 축하하지만, 기일은 축하하지 않는다. 내가 내 아이의 첫 생일에 앞으로 있을 기일을 미리 생각하게 된 순간부터,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져 보였고 그건 나를 계속 슬프게 한다.
‘어머니의 살을 헤집고 비어져 나온 내 머리를 보라 / 주먹! / 주먹! / 주먹! / 삶은 보자기를 펴 나를 감싸고, / 나는 졌다 / 지다니, / 지면서 태어나다니’
시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살을 헤집고 나온 자기 머리를 주먹이라고 표현한다. '주먹!'을 반복해 강한 투지를 보여주는 시인은 마치 탄생 자체를 이기기 위한 싸움처럼 묘사한다. 이렇게 투지를 가지고 태어난 '나'를 삶은 넓고 보드라운 보자기로 바로 펴 감싸버린다. 주먹은 보자기에게 태어나자마자 패배하고 만다. 삶은 이기려고 하지만 질 수밖에 없는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걸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타인과 싸우고, 질병과 싸우고, 시간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다 못해 나 자신과도 싸운다. 이런 삶을 죽음이라는 보자기는 결국 부드럽게 펴 감쌀 것이다. 죽음을 전제로 싸워가는 것. 죽음에게 결국 부드럽게 지겠지만 그래도 죽음을 향해 싸워간다는 표현이 경계를 모호하게 바라보는 나와 비슷해 위로가 되었다.
‘미래에서 온 아기들이 머리맡에 와서 본다 / 쟤도 죽었네, 쟤도 나처럼 미리 죽었네 / (죽음이 나와 동시에 태어난다)’
시인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동시에 태어난다고 직접적으로 명시한다. 우리는 미래에서 온 아기들을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아직 죽었다고 부를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삶과 죽음이 동시에 태어난다면 죽고 사는 상태의 경계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태어나기로 했다는 건 미리 죽은 것,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시인은 소개한다.
‘위아래로 머리가 달린 슬픈 짐승 / 서로 분리되기 위해 기다래질 때 / 비명 속에서 해체되는 것, / 탄생! / 탄생이 성공하면 죽음이 가벼워지고 / 죽음이 성공하면 탄생이 가벼워지는 / 놀이, 데칼코마니처럼 / 서로를 머금고 쪼개지는 / 이별의 탄생 / 탄생의 이별’
시인은 출산하는 여인과 아이를 '위아래로 머리가 달린 슬픈 짐승'라고 표현한다. 위와 아래 역시 반대된 개념이고 서로를 완성한다. 머리가 주먹이라고 하면 탄생을 주는 이는 위로, 탄생하려는 이는 아래로 주먹을 내밀고 싸우고 있는 상태다. 위아래로 길다란 선이 늘어나며 탄생에 승리할 때, 두 머리는 보자기에 싸여 동시에 패배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은 하나로 연결된 데칼코마니라고 말하며 탄생을 통해 죽음을 설명하는 시인의 방식이 기억에 남는다. 나 혼자 스쳐 지나가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을 나열하는 시는 깊게 남는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 모두가 위아래로 머리가 달린 슬픈 짐승이라는 걸 받아들일 때, 이 사실에서 오는 슬픔에는 인류적 보편성이 생긴다. 모두가 슬픈 상태로 죽음을 반복하며 태어나는 것이 담담하고 차갑게 다가온다.

<당신에게 _ 박연준>
모두가 슬프다는 건 사실이다. 죽음과 삶이 연결되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당연해서 가장 힘들 때가 있었다. 밥을 먹다가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가만히 앉아 숨을 쉬다가도 어차피 죽을 건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이유를 모르겠다는 생각을 시작한 이래로, 멈출 수 없었다. 웃으면서도 울면서도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고 진심으로 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정말 죽고 싶어서 내뱉었다. 항상 머릿속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던 죽음은 아마도 삶을 이해할 수 없어서 더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숨을 쉬게 된 동시에 숨을 거둘 것이라는 당연한 모순을 안고 또 뒤꽁무니에 죽은 애를 달고 돌아다니면서 계속해서 태어날 거라는 사실은 정말 낯설고 우울했다.
‘오래 전 내곁에 있던 사람은 진실만을 말했어 진실, 그게 얼마나 뾰족하고 딱딱한 건지 누울 수도, 기댈 수도, 삼킬 수도 없지 / 그런 걸 누가 갖고 싶어한담? / 그러나 나는 탐했다 진실을 탐한다는 건 편안해질 수 없다는 말 / 고통으로 침대를 적시고 바람으로 옷을 해 입는다는 말’
사는 게 곧 죽는 것이라는 진실은 뾰족하고 딱딱해서, 아무도 가지기 싫어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죽음은 기댈 수도, 누울 수도 없으며 삶 역시 삼키려 해도 절대 입안에 다 담기지 않아 뚝뚝 흘러 고통스럽다. 이렇게 좋을 게 하나 없어 보이는 진실이 자신을 아프게 해도 시인은 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파고드는 나처럼, 진실을 계속 원한다. 편안해질 수 없지만 그게 삶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계속 견뎌야 하는 명제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위 구절에서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옷을 입는 행동은 따뜻하고 포근하며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일상 같아 보인다. 모두가 저런 일상을 지키기 위해 죽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했었다. 이런 삶의 모습을 지속하는 전제는 고통으로 적셔진 몸을 쉬게 하기 위함이고, 살을 에는 바람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함이기에 곧 죽음과 가까이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뾰족하고 딱딱한 것을 견디기 위해 당연한 수순처럼 기댈 수 있고 누울 수 있는 존재를 찾아나가고, 그렇게 삶을 지속하는 모순을 행한다. 진실을 탐하는 건 살아가는 것, 그리고 결국 죽어가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어떤 시간은 결코 / 흐르지 않지 한자리에 쌓이다 분처럼 / 내려 앉을 뿐 (...)
진실로 이루어진 가옥에서 / 오래전 당신의 입술 살피다 / 당신 위에 / 분처럼 / 쌓이다 / 쌓이다 / 나는 / 흩어지겠네’
이렇게 시인과 나는 모두 삶과 죽음이 긴 선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모두가 탐하고 공유하는 불문율로 여긴다. 당신도 진실을 말하고, 시인도 진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진실은 아프고 뾰족하다. 그래서 시인은 당신의 입술이 다치지 않도록 계속해서 살피는 것이다. 진실로 이루어진 가옥은 죽음이 정해진 삶을 의미하고 그 가옥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당신을 보살피며 한톨의 사랑, 한톨의 시인이 그 위로 분처럼 쌓여간다. 보드라운 분가루를 떠올리면 연약하고 부드러운 입자가 살포시 내려앉는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녹을 걸 알면서도 내리는 눈처럼 무상하지만 따뜻하다. 이렇게 죽음 위에 시간을 쌓고 쌓으며 살다가 흩어지는 것을 시인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다.
삶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 시인은 죽음이란 분으로 흩어져서 또 어디선가에서 모이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은 그렇게 흩어지고, 죽음은 그렇게 모이는 모순을 시인은 당신, 즉 시를 읽고 있는 너와 함께 나누고자 한다. 처음 다뤘던 시 ’나의 탄생 – 나는 졌다‘ 에서 질 싸움을 시작한 ’나‘와 ’나‘를 세상에 내놓으려 홀로 질 싸움을 하는 여인을 함께 한 마리의 슬픈 짐승이라 묘사했을 때는 모두가 슬픈 것이니, 당연한 것이라는 공유의 정서를 전달받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 ’당신에게‘는 당신과 나,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아픈 진실을 보드랍고 따뜻하게 건네며 주먹을 감싸던 보자기처럼 함께 삶을, 죽음을 겪어보자고 따뜻하게 보듬는다.
'코 박고 죽고 싶어 그건 살고 싶다는 말이야' (...)
'한톨의 나도, 한톨의 사랑도, 잡을 수 없단다 / 그건 살자는 말이야 / 죽자는 말과 같지’
이 시의 시작과 끝은 수미상관으로, 죽고 싶다는 말이 살고 싶다는 말과 같고, 살자는 말은 죽자는 말과 같다는 이야기를 반복하며 마무리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몇 세대에 거쳐 '코 박고 죽어야지'라는 말을 삶이 버거울 때 재채기처럼 해왔다. 이렇게 해학적이고 가벼운 한국어 관용어구와 재채기에 관한 영미권 문화의 공통점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재채기하는 상대에게 ‘bless you’라는 말을 하는 문화는 그 순간 잠깐 숨이 멎는다고 생각해서 생겨났다고 한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삶에 가까이 있도록 붙잡아주기 위해서 인사말에도 죽음은 당연하고 따뜻하게 스며들어있다. 코 박고 죽고 싶다고 말하듯, 재채기하듯, 일상에서 종종 숨이 멎는 우리는 이렇게 종종 죽음을 살고 있다.
죽음과 같은 말은
결국 삶은 매 순간 죽음을 겪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톨의 나도, 한톨의 사랑도, 잡지 못한 채로 우리는 분가루 한톨 한톨 쌓여가다 결국 흩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톨 한톨이 모이며 시간이 쌓이는 것을 당신의 입술이 느끼고, 한톨의 ‘나’와 한톨의 ‘사랑’이 재채기 한 번에 날아갈 때마다 죽음을 겪는 당신에게 내가 축복을 전하는 것이 모순을 향한 길이라면 삶과 함께 기꺼이 죽음도 겪고 싶어진다. 코 박고 죽고 싶다고 한다면 그건 살자는 말이라는 사실이 우스워서 우리가 함께 웃는다면, 모두가 죽음을 생각할 때 가장 삶과 가까워지는 것 아닐까.
죽음과 삶은 기다란 선으로 연결되어 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삶이 달려가면 죽음이 찾아오고 다시 삶이 마중 나오는 그런 무한 굴레. 미리 죽은 아이가 태어난 아이에게 죽음을 축하하는 그런 것. ‘나 자신’과 ‘사랑’ 그 무엇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날카로운 진실을 알지만, 그 때문에 탐하게 되는 것. 이 하나의 명제가 박연준 시인과 내가 함께 말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시집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을 자주 꺼내 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