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사랑엔 언제나 ’만약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만약에 너와 내가 잘 된다면, 만약에 우리가 결혼한다면, 만약에 우리가 헤어진다면, 만약에 너와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사랑 앞에서의 ‘만약’은 호기심에서 불러오는 단순한 궁금증일까? 조금이라도 감정이 담긴 설렘과 후회의 질문일까?
영화 <두 번째 계절>은 오래전 이별한 두 남녀가 15년 만에 만나 인생에서의 공허함을 ‘만약‘으로 채우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장르가 멜로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영화를 곱씹을수록 이 영화는 로맨스를 가장한 ‘성장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 보기에 남부럽지않고안정적인 인생을 사는 두 중년이 오래전 이별을 다시 한번 정의하며 인생 2막을 여는 그런 영화이다. 제80회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으며, <아버지의 초상>으로 유명한 ‘스테판 브리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원제목은 ‘Out of Season’으로 ’비수기’라는 뜻을 의미하고 있다.
스타 배우 ’마티유’는 영화배우로 성공하여 부와 명성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를 곁에 둔 중년의 남성이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연극 무대를 준비하다 두려움으로 갑자기 취소하고 홀로 바닷가 휴양지에 있는 리조트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미 대대적으로 연극 홍보를 마친 상태이기에 책임지지 못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큰 마티유는 모처럼 홀로 힐링의 시간을 가지려 하지만, 리조트 내에는 가운을 두른 시니어들 천지에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는데 지쳐간다. 공허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에게 뜻밖의 쪽지가 도착하고, 15년 전 헤어진 연인 ‘알리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영화 초반, ‘마티유’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감독이 그와 관객 사이에 일종의 거리감을 두게끔 설정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객관적으로 저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마티유가 호텔방에 반강제적으로 갇혀 무기력하게 전자동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때나 커피포트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에스프레소를 쏟을 때는 묘한 동정심이 들며 가까워 지다가도, 아내에게 전화해 자신이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해 하소연을 털어놓는다거나, 뜬금없이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을 보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에 살짝 멀어진다. 그동안의 로맨스 영화가 남자 주인공에 대해 매력적인 모습으로 관객들을 설득하려고 애를 쓰던 모습에 비하면 이 영화는 반대 행보를 걷고 있다. 오히려 주인공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리를 주며 그가 ‘남성’으로서 가 아닌 ’사람’으로서 현재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 섬세한 연출이 앞으로 이 영화의 서사가 남녀의 멜로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변화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한때 사랑했던 ’알리스’는 어떤 사람일까?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 뒤에나 등장한 알리스의 모습 또한 여느 멜로 영화와 달랐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우연히 처마 밑에서 만나는 우연 속 아름다운 모습이라던가, 플래시백을 통한 젊은 시절의 사랑하던 모습을 그린 연출 대신 가만히 카페에 앉아 마티유에의 등장에 낯설면서 신기해하는 평범한 중년 여자의 모습을 담았다. 두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듯 처음엔 아주 멀찍이 풀샷으로 모습을 담다가 대화가 자연스럽게 풀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가까이 카메라도 다가갔는데,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있어선 객관적이지만 두 남녀의 진심만큼은 감정적으로 다가가는 감독의 연출 덕에 관객들도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의사 남편에 15살이 된 성장한 딸을 둔 알리스는 화목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이뤘지만, 남편 지인들을 초대한 모임에서 소외되는 대화와 다 커버린 딸의 시간 속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유령처럼 침묵 속의 집에서 말 대신 피아노를 치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마티유의 방문 소식은 사고였을까? 기회였을까?
두 사람은 헤어진 지 15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농담이 통하고, 대화가 즐거운 사이였다. 하지만 연애 프로그램 ‘환승 연애‘에서도 볼 수 있듯이 헤어진 연인이 재회를 하면 반가움과 기쁨이 오는 동시에 옛 기억 속 다툼의 원인도 함께 오게 된다. ’알리스‘의 마음속에는 15년 전 온전치 못한 이별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자신이 아닌 화려한 직업과 외모를 가진 지금의 마티유의 아내를 마티유가 결혼 상대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며 초라한 자신의 옛 모습을 탓하고 있었다. 물론 마티유는 헤어짐의 원인은 그 때문이 아니라 말했지만, 현재 자신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의 과거의 자신도 아름답게 정의하지 못하는 알리스의 모습에서 그녀가 지금 흔히 말하는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는 이때부터 완전히 마티유에서 알리스의 모습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두 사람이 다시 마음이 통할수록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뒤섞여 온다. 그런 와중에 마티유는 이곳으로 새로운 도전으로부터 도망치듯 휴양을 왔다곤 말 못 하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에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반면, 알리스는 솔직한 태도로 잊혔던 자신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 한 발 한 발 발맞춰 나아가기 시작한다. 알리스는 마티유에게 한 인터뷰 영상을 보내게 되는데, 영상 속 백발의 할머니는 안정적인 결혼 생활과 인생을 가졌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며 끝사랑으로 동성의 연인과의 재혼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 영상을 본 이후 도 사람을 바다를 거닐고 영상 속 할머니의 결혼식에도 참여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고, 외로움에 대한 사랑과 못난 자신을 향한 연민이 뒤섞인 혼돈의 감정 속에서 동침하게 된다.
스테판 브리제 감독은 이 영화가 한편으론 ‘용기 있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오랜 세월 속 끝사랑으로 솔직한 사랑을 택한 할머니처럼 알리스 또한 젊은 시절부터 이어오던 끊임없는 자기 의심과 커리어에 대한 좌절감을 다시 만난 연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마주하며, 천천히 매듭짓고 있는 이야기 같았다. 작사가 김이나는 알리스와 마티유의 모습을 보며, 지나간 자신의 영광 속에 살던 사람들이 현재의 좌절감에 대해 용기 있게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발 물러나는 용기를 표현한 영화라고 말했다. 영화 중 동네 엉터리 트레이너가 마티유에게 운동법을 알려주며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우리는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며 마티유에게 ”숨은 쉬는데 호흡은 안 하네요“라고 말한다. 그렇다. 호흡이라는 건 잘 들이마시기도 하지만, 잘 내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침대에 누우면 생각나는 과거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책감들을 피하는 대신 가끔은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차분히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 1 막을 마무리하고 2 막을 새로 시작하는 마티유와 알리스처럼 솔직하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날이 오길 바라며 천천히 호흡하는 법을 연습하고 연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