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나는 엄마, 아빠가 어려워할 만한 질문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는 왜 태어났어?” “내가 태어나기 전엔 뭐였어?” 등과 같이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쳐가야하는 난감 질문 퀘스트장을 심심치 않게 열었던 것 같다. 또렷하게 기억에 남을 만한 대답을 말로 해주신 적은 없지만, 대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다와 산으로 캠핑을 떠나고 주말마다 놀이공원, 박물관, 미술관, 체험관 등 온갖 경험과 추억들을 안겨주셨다. 어린 시절의 경험들은 모두 기억할 순 없어도 아이의 감수성으로 남는다는 말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문화를 사랑하고, 그것들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생긴 건 어쩌면 어린 시절 가족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2025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영화 <리틀 아멜리>를 보며 그 사랑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2026년 1월 14일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리틀 아멜리>는 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을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프랑스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제78회 칸 영화제 특별 상영 부문에 공식 초청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27회 부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장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신이라 여기는 세 살 소녀 ‘아멜리’와 유모 ‘니시오‘가 함께 사계절을 보내며 만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오색찬란 성장 판타지이다.
영화 포스터를 볼 때부터 느꼈지만 말 그대로 ‘오색찬란’한 색감에 첫 장면부터 마음을 빼앗긴다. 물방울의 투명함과 맑은 빛깔의 색감들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관객이 마치 세 살 아이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로 보고 있는 듯한 황홀한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초록빛들에 대한 표현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동그랗고 큰 두 눈에 박힌 초록 구슬같이 투명한 초록빛의 눈동자는 마치 지구를 보는 듯했다. 영화에서는 아멜리의 ‘시선‘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그래서인지 아멜리와 소울 메이트인 할머니도 같은 초록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초록색은 뭔가 자연을 떠올리게 해 순수한 느낌을 주면서도 지적이고 호기심이 가득한 이미지로 보이게 해 세상에 눈을 뜨게 된 아멜리를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색인 것 같았다.
초록빛이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바다’를 표현할 때였는데, 아멜리의 ‘아메‘는 일본어로 ’비’를 뜻하여 그런지 물을 표현할 때 파란색과 초록색의 적절하게 섞어 표현한 것 같다. 특히 아멜리에게 세 살 인생 큰 영향을 주는 바닷가는 태양에 반사된 노란 윤슬들과 에메랄드빛색을 띠고 있어 따뜻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 나도 모르게 우와 하고 입모양을 자아냈다. 초록색뿐만 아니라 아멜리와 마음이 맞는 유모 ‘니시오‘가 나타내는 ’노란색’,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집주인의 ‘보라색‘도 엄마와 언니의 ’파란색’눈도 아빠와 오빠의 ‘녹색’ 눈 모두 하나하나 어우러져 움직이는 동화책처럼 느껴져 눈을 뗄 수 없는 77분이었다.
“나를 좋아하면 행복이 넘칠 거예요”
세 살이 돼서야 세상에 눈을 뜨게 된 ’신‘ 아멜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한 아기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죽음‘이나 ’미움’, ‘가족’ ’사랑‘과 같은 철학적이고 성숙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 아멜리의 생각을 따라 사계절이 표현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봄은 사랑의 생기를 피워내고, 여름은 비를 따라 호기심과 슬픔이 흘러내리며, 가을엔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인한 상실감이 떨어지고, 겨울은 함께하는 온기로 훈훈해진다. 계절을 따라 경험하는 것이 많아지며 ’니시오’와 가족들의 사랑을 통해 아멜리는 ‘나’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존재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무겁지 않고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되는 포인트를 많이 섞어 경쾌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인 듯하다. 세 살 아이의 시선이라고 하여 마냥 순수하고 맑게만 풀어낼 줄 알았는데, 문학적인 질문들과 시네마틱 한 연출의 조합이 어우러져 어른들도 이 영화를 보며 ‘삶’이 주는 행복과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
새해를 맞이한 2026년 1월 1일인 오늘, “추억은 영원히 남는다”라는 리틀 아멜리의 명대사를 곱씹으며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아픈 기억도 추억으로 만들 수 있을까? 2025년을 돌아보면 모든 시간이 오색 찬란하진 않았던 것 같다. 어른이기 때문에 아니라 안 좋은 기억은 그저 불에 태워 없애버리려고만 하던 나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로 남은 기억은 바람에 날려 금방 사라질 순 있어도 그을린 자국을 남긴다. 생각과 질문을 멈추지 않고 근사한 결론을 내린 아멜리처럼 새로운 한 해부터는 좋은 기억도 안 좋은 기억도 내 것으로 흡수될 수 있게 꼭꼭 씹어 보이는 성숙한 태도를 갖춰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