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올해의 끝을 응시한다. 끝이 끝을 거듭 부정하여 나는 무엇을 끝맺고자 하는지 모르는 채로 버려진다. 눈을 감고 뒷걸음질 친다. 그러다 뜀박질을 시작한다. 이내 가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일을 멈추고 누군가와 무심하게 악수를 한. 올해 내가 했던 일의 전부, 지나온 것들의 잔상이다.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사념이 내 두 발을 흐리게 한다.

 

(......)

 

그래도 전보다 사람들에게 많이 웃어주었던 것 같아요. 조금 더 가벼운 마음도 갖고 싶어요. 시의 밀도는 어떤가요? 어떤 과일을 베어 물어도 과즙이 흐르지 않는 꿈. 꿈에는 상승과 하강의 꿈이 개재해 있어 이중, 삼중으로 중첩을 이루니 나는 몰락을, 당신은 여행을 꿈꾸는 듯해요. 돌아오지 않을 여행이어도 좋아요. 잠시 머물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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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앙포르멜> - 김종삼



 

나의 무지는 어제 속에 잠든 亡骸 세자르 프랑크가 살던 사원 주변에 머물렀다.

 

나의 무지는 스테판 말라르메가 살던 본가에 머물렀다.

 

그가 태던 곰방댈 훔쳐내었다.

훔쳐낸 곰방댈 물고서 

나의 하잘것이 없는 무지는

반 고흐가 다니던 가을의 근교 길바닥에 머물렀다.

그의 발바닥 만한 낙엽이 흩어졌다.

어느 곳은 쌓이었다.

 

나의 하잘것이 없는 무지는

장 폴 사르트르가 경영하는 연탄 공장의 직공이 되었다.

파면되었다.

 

 

나의 무지는 곧 나의 존재 방식이에요. 위대한 예술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본가에서, 가을의 근교 길바닥에서 머무르는 무지는 삶의 파편이고 마모된 흔적이에요. 사르트르가 경영하는 연탄 공장의 직공이 되어서도 예술을 생각해요. 그것이 파면의 이유가 되었나요.

 

그리고 당신이 머물렀던 곳에 머물러요. 아무 의미 없이 밀려나는 것도 좋지만 그러면서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어요. 특히 내가 그리던 뒷모습과 닮지 않았을 것 같아 그리워질 것 같고요. 명확한 서사가 없는 앙포르멜처럼 고정된 실체를 떠난 유영, 여전히 내가 어디로 흘러갈지 궁금한가요?

 

낙엽이 흩어지는 계절에, 기다림은 없고 그리움만 가득한 계절에 돌아오길 바라요.

 

 

 

2. <시인> - 파블로 네루다



 

전에 나는 고통스러운 사랑에 붙잡혀

인생을 살았고, 어린 잎 모양의 석영(石英) 조각을

소중히 보살폈으며

눈을 삶에 고정시켰다.

너그러움을 사러 나갔고, 탐욕의 시장을

걸어 다녔다, 아주 은밀한 시샘의 냄새를

맡으며, 가면들과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적대감을 들이마시며.

나는 저습지들의 세계를 살았다―

그 돌연한 꽃, 흰 나리가

그 떨리는 거품 속에 나를 삼키고

발을 옮길 때마다 내 영혼이

나락의 이빨 속으로 빠져 드는 곳.

내 시는 이렇게 태어났다―어려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형벌처럼

고독에서 벗어나면서,

또는 뻔뻔스러운 정원에서

그 가장 신비한 꽃을 숨겼다, 마치 그걸 묻듯이.

이렇게 깊은 수로에 사는 

검은 물처럼 격리되어

나는 손에서 손으로 도망쳤다, 각 존재의 

소외에로, 나날의 증오에로.

그들이 그렇게 살았음을 나는 알았다, 낯선

바다에서 온 물고기처럼, 그들

존재의 반을 숨기고, 그리고 어둑한

광막함 속에서 나는 죽음을 만났다.

문들과 길들을 여는 죽음.

벽 위로 미끄러지는 죽음.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 날마다 시를 생각하는 것은 죄가 된다. 선고와 형벌이 함께 오는 일이다. 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나락의 이빨 속으로 빠져드는데, 다시 시를 쓰게 되는 날에는 얼마나 큰 형벌을 받아야 할까. 손에서 손으로 도망치듯, 시에서 도망쳐도 다시 시가 있다. 왜 돌연한 꽃을 찾게 되어 이처럼 어둑한 광막함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일까. 오직 사람만이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삶을 시작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죽음을 일찍 알아차리는 일은 더없는 불행이다. 죽음을 모르고 죽음에 이르는 길과 다르지 않을 만큼.

 

반면 고통스러운 사랑에 붙잡혀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행복에 가깝다. 되돌아갈 수 없는 날의 사랑이 없었다면, 내가 그 사람과 작별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과 지나치게 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면 나는 시 쓰기를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시가 아닌 것들만 심탐했을 것이다. 내가 시를 멈추었다는 것이, 아니 시가 나를 멈추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도 나의 등 뒤에서는 시의 신비로운 꽃향기가 허기처럼 번져 간다. 검은 물이 넘실거리는 뻔뻔스러운 정원에서 이제는 시가 나를 보살핀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의 한 단편 소설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내 나날의 삶 속에서, 나는 평온한 사람이었고, 법률과 지도자들과 제도(관습)의 적이었다. 나는 중산층이 싫었고, 예술가든 범죄자들이든지 간에 불안정하고 불만에 찬 사람들의 삶을 좋아했다." 나는 불안 속의 평온일까, 평온 속의 불안일까. 어느 쪽이든 시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서도 시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 <선잠> - 최승자



 

시간은 아득히 별들의 밑을 운행하고 있다.

빈 발자국 소리가 잠 속으로 얽혀든다.

자동차 한 대가 내 머릿속을 질주해 간다.

내 꿈의 지도 위에 분계선을 그으며.

나는 놀라서 깨어난다.

달빛이 무서운 벽화처럼 창에 걸려 있다.

오래 뒤척이며 묵은 공상들을 털어 버린다.

하나씩 둘씩 하나씩...... 천천히 몸의 모든

기관이 흐려진다

귀와 눈, 손과 발.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내 꿈의 테이프.

 

저승의 물결 같은 선잠만 오락가락

밤새 내 머릿골을 하얗게 씻어 가누나.

 

 

꿈과 현실의 분계선을 긋는 일마저 꿈의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두려워요. 잠을 자지 않을 때도 내 몸의 모든 기관이 흐려져요. 몸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시간에 정신은 은밀한 곳으로 숨어들어요.

 

새해에는 오래 뒤척이며 묵은 공상들을 털어 버리고 싶어요. 새로운 공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해요. 늘어진 꿈의 테이프처럼 흐느적거리다, 몇 번이고 죽어 없어질 몸을 채우는 공상을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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