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대한 나의 관점은 긍정보단 부정에 가까웠다. 여행은 눈녹듯 빠르게 지나가고 내게 남는 것은 추억 뿐 이니까. 여행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변한 것은 최근 일이다.
2024년 12월, 도쿄에 다녀왔다. 디즈니랜드, 시바 공원, 시부야 스크램블, 오모테산도 곳곳을 누볐다. 물론 소중한 추억이었으나, 카메라를 샀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새로 산 책, 혹은 원래 좋아했던 책, 개봉해서 보러 간 영화 속에 반복해서 도쿄가 등장했다. 이를테면 동경하는 마음으로 내용도 보지 않고 구매한 책, ‘무과수의 기록’은 도쿄에서의 기록이었다. 인상 깊게 읽고 있던 책,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에도 도쿄의 작은 식물원이 등장했다. 우연히 보러 간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의 일상을 다뤘다. 심지어 영화에 등장한 화장실 중 하나는 도쿄 여행 때 실제로 이용했던 곳이었다. 원의 형태의 독특한 구조로 된 화장실이라 기억에 남았는데, 유독 이곳의 장면들이 마음을 울렸다.
1. ‘무과수의 기록’
‘무과수의 기록’-도쿄 편은 무과수 작가가 한 달동안 도쿄에 머물며 기록과 필름 사진을 엮어둔 에세이집이다. ‘한 달’은 짧지만 긴 시간이 아닌가. 여행자의 설렘은 희석되고, 낯선 풍경은 일상의 장면으로 변하는 시간. 그래서 이 책에는 지긋이 앉아 흘러가는 시간을 포착한 기록이 담겨 있다. 계획대로 바쁘게 움직였던 여행자인 나와 달리, 이곳의 도쿄는 느리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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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다 보니 들판과 언덕이 공존하는 곳을 발견하게 됐는데, 두 팔로도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정중앙에 있고 그 주위로 아이들이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었다. 사람들은 돗자리를 펴고 직접 만들어 온 도시락을 먹거나, 텐트를 설치해 캠핑하거나, 강아지와 산책하는 등 같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신기했던 건 거북이와 산책을 하는 모습이었는데, 자전거를 탄 할아버지께서 거북이의 느릿한 보폭에 맞춰 뒤따라가고 계셨다. 나만 신기했던 아니었는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은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한참을 구경했다.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나의 일상에도 그런 장면이 자연스레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주말이면 어김없이 혼자든 여럿이든 가까운 공원으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공원이 집 주변에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축복인 것 같다.
4월 30일. 무과수 작가가 히카리가오카 공원을 찾았다가 발견한 장면들이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 거북이와 산책하는 할아버지라니. 거북이처럼 느린 보폭으로 걸어야 만날 수 있는 장면들이다.
나는 지난 도쿄 여행에서 시바 공원을 찾았다. 시바 공원은 도쿄 타워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공원으로 관광객들에게 유명하다. 그러나 더 기억에 남았던 건 도쿄 타워가 얼마나 예뻤는지 보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가방에 키링을 주렁주렁 매달고, 천진난만하게 걷는 학생들의 뒷모습, 함께 손을 잡고 산책하는 노부부, 바닥에 떨어진 노란 단풍들, 강아지와 산책 나온 빨간 모자의 할아버지. ‘무과수의 기록’을 읽으며 그때의 풍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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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주쿠에서 급행을 타면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에노시마와 가마쿠라’로 떠나보기로 했다. 빠르게 준비하고 집을 나서니 아침 8시. 지하철에 탔는데 평소와 달리 사람이 많길래 생각해 보니 평일이자 출근 시간대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곳으로 출근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반복되는 것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
타이밍 좋게 에노시마로 가는 급속 열차를 탈 수 있었고, 오다큐선 편도행 기차표를 구매한 뒤 시간 맞춰 올라탔다. 창밖으로는 봄과 여름이 번갈아 가며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땐 어김없이 블랙 노트를 꺼내 하얀 여백 위로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쏟아냈다. (...)
배를 채우니 좀 걷고 싶어져서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지로 유명한 ‘가마쿠라 코코마에’역에 갔다가 수많은 인파에 놀라 잠깐만 구경하고 다시 에노덴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전철을 타고 가다가 어느 역에서 그냥 내려버렸는데, 간판에 쓰인 이름을 확인해 보니 ‘wadazuka’라는 곳이었다.
5월 18일. 가마쿠라로 향하는 작가의 여정을 담은 기록이다. 이날의 기록은 낯설기보다 익숙했다. 지난 도쿄여행에서 똑같이 지나 온 여정이기 때문이다. ‘가마쿠라’는 내키지 않아 보이는 친구를 설득해 겨우 일정에 넣은 곳이었다. 시부야의 화려한 야경도 좋았지만 고요하고 한적한 골목을 느끼고 싶었다. 가장 기대했던 건 가마쿠라의 교통수단 ‘에노덴’ 전철이었다. 친구와 나는 ‘에노덴’을 타고 ‘가마쿠라 코코마에역’에 내렸다. 만화 슬램덩크 배경지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친구와 나는 사진 몇 장 찍고 철도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동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금방 어둑해졌고, 아쉬운 마음에 주변 카페로 들어갔다. 주택을 개조한 작은 카페라 공간은 아담했으나, 벽면이 통창 유리로 되어 있어 답답하지 않았다. 손님 중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와 친구밖에 없었지만 적당한 환대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일상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듯했다. 잠깐이었지만, 도쿄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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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이 길어지다 보면 ‘함께’ 하는 순간이 무척 반갑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인연이라면 더더욱. 그녀는 자전거가 있었지만 나의 걸음 속도에 맞춰 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톰마’였다. 신기했던 건 히로미상에 이어 톰마도 예전에 포토그래퍼로 활동했었다는 것이었다. 서핑을 좋아해서 원래는 요코하마에 있다가 지금은 가마쿠라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 안에도 꽤 많은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눴고, 그 덕분에 금세 목적지에도 도착할 수 있었다.
슬램덩크를 본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여기가 다시 보고 싶었던 걸까. 톰나는 여행 가이드 일을 하기도 하는데, 이곳이 유명한 곳인지는 몰랐다며 관광객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했다. 그리고는 이곳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조금 늦게 나와서 여전히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톰마와 함께여서 그런지 특별한 기억으로 남길 수 있었다.
5월 21일. 작가가 가마쿠라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은 후, 우연히 만난 인연과의 에피소드를 다룬 기록이다. 나는 지난 도쿄 여행에서 시부야 골목의 작은 가게들 안에 밀착해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저 안에서 어떤 인연들이 맺어지고, 또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걸까.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은 내게 어떻게 기억될까.
그런 궁금증과 아쉬움을 풀어준 것이 이날의 기록이다. 내가 잠깐 머물렀던 가마쿠라의 추억으로 누군가 간직한 가마쿠라의 기억을 생생히 감각할 수 있었다. 같은 문장이라 하여도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읽히듯, 익숙하지만 낯선 문장들이 되어 내게 와닿았다.
2.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페펙트 데이즈’는 공중 화장실 개선 작업인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도쿄 시부야 화장실 청소부의 일상을 다룬 영화다. 본편에서 주인공 히로야마의 삶은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생생히 포착된다. 이를테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히로야마의 꿈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긴 시간을 들여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화장실 청소 장면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든다.
내가 도쿄 여행에서 실제로 이용했던 화장실은 원 형태의 화장실이다. 히로야마는 경건한 태도로 이곳을 청소하고, 카메라는 그의 옆에 가까이 붙어 있다. 카메라는 그가 매일 반복했을 루틴(화장실을 닦고 쓸고 정리하는)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그리고 화면이 전환되면, 히로야마의 시선으로 화장실 천장을 응시하는데 그곳엔 이동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반사되어 일렁이고 있다. 마치 ‘고모레비’(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처럼. 점심시간마다 히로야마가 올려다 본 하늘에서 일렁이던 풍경은 히로야마의 일터에서 또 다른 형태로 일렁인다. 히로야마의 고단한 일터에도 나른한 휴식의 풍경이 비춘다.
이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여행의 기억은 일상 곳곳에서 나타난다. 히로야마가 화장실 천장에서 일렁이는 햇살을 발견하듯, 일상 속에서 지난 도쿄에서의 기억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내가 또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