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양의 유작 <하나 그리고 둘>(Yi Yi)은 한 가족의 일상을 통해 인생의 전체 스펙트럼을 조망한다. 영화는 결혼식으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을 맺으며, 그 사이에 놓인 탄생과 죽음, 사랑과 이별이라는 보편적인 생의 궤적을 3시간의 러닝타임 안에 직조해낸다. 이 흐름 속에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과연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실제로 파악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절반 : 양양의 카메라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은 어린 아들 양양이 들고 다니는 카메라다. 양양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진실 중 절반만을 보며 살아간다. 양양의 행위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예술 혹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비로소 마주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동시에 우리가 삶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거리두기를 통한 성찰의 미학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는 인물들에게성급히 다가가지 않는다. 유리에 비친 도시의 투영이나 롱테이크를 통해 일정한 관찰자적 시점을 유지한다. 이러한 절제된 거리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그들의 삶을 나의 삶으로 객관화하여 성찰하게 만든다. 도시의 불빛과 인물의 얼굴이 겹쳐지는 연출은 현대 사회 속 개인의 고독과 연결성을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증명한다.
결국 팅팅은 꿈속에서 할머니와 조우하며 “세상이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는 위로를 얻는다. 이는 무언가를 해결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오는 마음의 평온에 가깝다.
꽉 쥘수록 새어나가는 삶의 통제권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인생의 불확실성을 붙잡아보려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가족의 중심에서 가장 위태로운 성장의 통로를 지나는 딸 팅팅은 삶의 인과관계를 스스로의 안에서 찾으려 애쓴다. 그녀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자신이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자책하며, 서툰 첫사랑의 실패 또한 자신의 정성으로 극복해보려 한다. 하지만 팅팅이 겪는 상실은 삶이 단순히 개인의 선의나 노력만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프게 가르쳐준다. 이러한 양상은 어른들에게서도 반복된다.
아빠 NJ는 사업적 위기 속에서 일본으로 떠나 옛 첫사랑을 다시 붙잡아보려 한다. 인생의 경로를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짧은 일탈 끝에 그는 깨닫는다. “다시 시작해 봐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들이 겪는 좌절은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붙잡으려 애쓸수록 삶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더 빠르게 새어나간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인생은 우리가 꽉 쥘 수 있는 확신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거대한 강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나, 그리고 둘
영화의 말미 할머니의 영전 앞에서 낭독하는 양양의 편지는 이 영화의 백미다. “나도 이제 내가 모르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사람들이 못 보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라는 아이의 고백은 곧 에드워드 양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는 예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하나 그리고 둘>은 인생이란 1(하나)과 1(하나)이 모여 2가 되는 덧셈의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는 절반과 내가 보지 못하는 뒷모습(절반)이 모여 비로소 온전한 '하나'의 생을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삶을 꽉 쥐려 했던 손을 힘없이 풀 때 비로소 새어나갔던 것들의 정체가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 삶이 유독 복잡하고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날, 이 영화는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생의 뒷모습을 가만히 비춰주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