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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 나이 스물아홉, 내년이면 한국의 세는 나이로 서른을 맞이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면서 서른이 갖는 무게감이 예전만은 못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서른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감 있게 일인 분 몫을 해내는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수는 할 수 있어도 더 이상의 방황은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은 나이. 그게 내가 생각한 서른이었다. 이 나이쯤 되면 적어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알 줄 알았는데,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미래에 대한 어떤 확신이나 뚜렷한 계획도 없이 서른을 맞이해야 한다니. 삼십 대로 넘어가는 일에 호들갑을 떠는 건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작년의 나는 은근슬쩍 빠른 연생을 앞세우며 코앞까지 다가온 서른을 유예했다. 원래 내 나이대로 살아가는 것일 뿐인데도, 보너스를 탄 느낌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내 나름의 목표를 세웠다.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며 내가 얼마나 변화하고 성장했는지 살펴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다시 설정해 보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벅차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과 욕심껏 벌인 일을 겨우 쳐내면서, 틈틈이 보고 싶은 영화나 책, 공연을 보려 욕심부리다 보니 혼자 깊이 생각할 시간이나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숙했던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일과 답 없어 보이는 깜깜한 미래를 점쳐보는 일 모두 고통스러워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시간을 줄줄 흘리고 다니다 보니, 어느새 서른이 되기까지 남은 기간은 약 두 달. 아무 생각 없이 덜컥 서른을 맞이하게 된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자 이십 대를 마무리 짓는 여행을 떠나보기로 결심했다. 복잡하고 번잡한 도시인 서울을 벗어나 호젓하고 공기 좋은 낯선 지역에 도착하기만 하면, 왠지 지금까진 없었던 내 과거와 미래를 직면할 용기가 생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1월 초, 약간의 초조함과 설렘을 안은 채 나는 구례로 향했다.


여행 첫날, 숙소에 무거운 짐가방을 먼저 맡기고 그곳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쌍산재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방을 맡기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숙소를 나서는데, 순간 아주 중요한 걸 빼놓고 온 듯한 썰렁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달라 이어폰이 들어있어야 할 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다. 혹시 몰라 옷에 있는 온갖 주머니와 가방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이어폰은 보이지 않았다. 짐가방 파우치 속에 들어있을 이어폰이 나보다 먼저 객실에 도착해 체크인을 완료한 상황이었다. 참고로, 나는 집 앞 5분 거리 편의점에 갈 때도 무조건 이어폰을 챙겨나가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급해,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굳이 앞질러야 속이 편했던 나는 신나고 흥겨운 음악의 힘을 빌려 평생을 빠르게 걸으며 살아왔다. 또한, 내게 걷는다는 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공상에 빠져드는 일이기도 한데, 이때 음악은 나만의 세계에 즉시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고 여러 영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런 내게 이어폰 없이 낯선 길을 걸으라는 건 무척이나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3층으로 올라가신 사장님을 다시 부르기가 더 불편했던 나로서는 이 슬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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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음악 없이 길을 걷는 게 매우 낯설고 허전했다. 마치 영화음악 하나 없이 대사만 나오는 영화를 2시간 내내 보는 거 같다고 해야 할까. 그동안 내가 길을 걸으면서 청각이 주는 자극에 얼마나 의존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나의 허전한 귓가를 메워주는 건 눈앞에 펼쳐진 구례의 시골길 풍경이었다. 아직 완전히 단풍이 물들진 않았지만, 서서히 가을 빛깔 옷을 입어가던 나무들과 햇빛에 비치어 별처럼 반짝이던 시냇물 그리고 돌담 사이로 조용히 피어난 한 송이 장미꽃 등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면 있는지도 모르고 빠르게 지나쳤을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가을을 만끽하다 보니, 어느새 멀게만 느껴졌던 쌍산재에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혼자서도 충만한 시간을 보낸 나는 넘쳐나는 자신감으로, 다음날 숙소에서 화엄사까지 걸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숙소에서 화엄사까지의 거리는 3.7km, 지도 앱에서는 도보로 걸으면 약 1시간 11분 정도가 걸린다고 나온다. 산속에 있는 절이라 사실상 등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나는 30분을 걸었는데 1시간을 못 걷겠냐며, 무식해서 용감한 자의 모습으로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이어폰은 일부러 착용하지 않았다. 잠시 음악을 꺼두면, 보고 느낄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아진다는 걸 전날의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가을의 색깔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는 지리산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어 갈수록, 시야뿐만 아니라 청각의 감각도 한층 더 트이는 게 느껴졌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청아한 소리, 계곡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질 때 내는 시원한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등 평소엔 인식하지 못했던 자연의 풍부한 소리가 와락 휘몰아쳤다. 지리산의 다채로운 풍경과 맑고 깨끗한 자연의 선율에 정신을 못 차리던 나는 여기에 현혹되어 이번 여행의 목적을 잊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며 미래를 살펴보려 할수록 오히려 현재에 더 머물게 되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내 모든 감각과 마음이 지금의 순간에 완전히 사로잡혀 다른 곳에 시선 돌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마치 다른 시공간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며 걷고 또 걸었다.

 

아직도 나는 내 미래에 대한 뚜렷한 답이나 방향을 찾지 못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날은 다 알 것 같다 가도, 다음날이면 다시 갈피조차 못 잡은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제는 중요한 걸 놓친 사람처럼 애면글면하거나 예전처럼 크게 초조해하지 않는다. 나만의 속도에 맞춰 걸으면, 과거와 미래의 불안에서 벗어나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구례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여행 마지막 날, 기차를 놓칠세라 역으로 바삐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30’과 ‘천천히’가 나란히 적힌 교통표지판이었다. 그게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겐 다가올 삼십 대에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살라는 신비스러운 계시처럼 느껴졌으니까. 나는 다시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빠르게 옆으로 휙 쓰러지던 풍경들과 일일이 시선을 마주치며 걸었다. 현재에 살며, 매 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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