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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각의 오케스트라 - 미식이라는 지성적 경험
미식은 클래식을 듣는 것과 같다. 하나의 악기가 독주를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음색만을 음미한다. 하지만 악보 위에서 현악과 관악, 금관과 타악이 서로를 덮고 들어오면, 더 이상 개별 음들은 분별되지 않는다. 오직 하모니라는 총체적 흐름만이 귀를 점유한다. 음식도 그렇다. 재료의 단맛, 지방의 농밀한 감촉, 열의 방향, 입천장에서 튕기는 산미, 그리고 코끝에 스치는 향. 요리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생존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성의 감각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다. 그 미세한 균형을 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임과 동시에 동물임을 증명한다. 향신료는 바로 이 균형의 중심에서, 때로는 주선율로, 때로는 배경의 화음으로 작용하며 미식 경험의 층위를 결정짓는다.
이 책 『향신료, 인류사를 수놓은 맛과 향의 프리즘』을 처음 펼쳤을 때, 나는 그런 미식적 감각의 서사를 기대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책을 만든 주체가 오뚜기의 ‘오카이브’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라는 사실이었다. 한국인의 식탁을 가장 일상적인 방식으로 점유해온 기업, 국물 베이스와 라면 스프로 대표되는 일종의 '조미료 인프라'. 산업적 재료를 공급하는 이 회사가 향신료의 본질을 탐색하는 책을 낸다는 것은 단순한 마케팅 이상의 문화적 모순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 모순이야말로 이 기획의 핵심이다. 일상성과 미학적 즐거움이 만나면서 '대중의 감각 문해력'을 높이려는 욕망. 나는 이 발상 자체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 자체가 오뚜기가 대중들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제품을 파는 기업이 아닌, 재료로 요리를 배우게 하는 기업.
향신료는 원래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제국의 탐욕과 식민의 폭력 위에서 유통되었다. 그런 물질적 역사를 가진 향을 일반 소비자가 접근 가능한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는 문화적 민주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오뚜기라는 대중적 브랜드가 이 작업의 주체라는 사실은, 어쩌면 엘리트주의적 미식 담론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반박일지도 모른다.
2. 사전이라는 형식 - 건조함 속에 깃든 정직성
예쁜 표지와 달리 책의 형식은 예상과 달랐다. 서사적 에세이나 과학적 설명이 중심이 아니라, 거의 사전에 가깝다. 각 향신료는 표제어처럼 등장한다. 사진으로 시작해, 그 재료를 부르는 여러 지역의 이름과 범주가 나오고, 향의 성격, 맛의 결, 조리 방식, 그리고 약재로서 사용된 사례가 차례대로 정리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적 서사나 미식적 에세이를 기대하다가, 어느새 정리의 구조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장은 건조하다. 그러나 그 건조함이 오히려 정직하다. 향을 과장하지 않고, 경험되지 못한 원물의 모습—우리가 보통은 가루, 액상, 블렌드로 소비하는 것들의 생물학적 형체—를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그 사진들을 보며 잠시 멈췄다. '아, 정향은 이렇게 생겼구나.' '이 껍질이 계피라면, 내가 먹어온 계피는 도대체 어디에서 분화된 것인가.' 설명은 건조했지만, 사진은 혀를 움직였다. 읽는 동안 나는 텍스트를 소비한 것이 아니라 맛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성취다. 언어가 감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감각을 촉발한다.
이 사전적 구성은 독자의 읽기 방식 자체를 전환시킨다. 이 책은 의자에 앉아 감탄하면서 읽는 책이 아니다. 음식점에서 낯선 향신료를 발견했을 때, 혹은 주방에서 향신료 라벨을 바라볼 때, 다시 펼쳐보는 책이다. 고추에도 위치에 따라 다른 맛을 낸다는 사실, 세이지 풀에 대한 인식이 약재에 가까웠다는 문화적 맥락을 이 책은 소리 없이 알려준다.
향신료는 단순한 맛의 재료가 아니라 감각의 어휘다. 이 책은 바로 그 어휘를 제공한다. 미식의 교양은 감각을 꾸며내는 수사적 능력이 아니라, 감각을 정확히 지칭할 단어를 확보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맛을 아는 것과 맛을 말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리. 이 책은 그 거리를 좁히는 도구다.
3. 서사의 부재와 실천의 복원 - 한계이자 선택
다만, 그 탁월한 정리력은 동시에 한계를 낳는다. 이 책은 향신료와 인간의 역사, 교역, 지배, 폭력의 층위를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향신료가 '검은 금'이던 시절의 제국적 경쟁, 동인도회사의 구조적 폭력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 대신 건조하게 요약된 역사를 전달하거나 재료의 물성에 접근하는 데 집중한다. 정보의 성실성은 높지만, 서사는 부족하다. 미식의 감정적 강렬함이나, 향신료가 만들어낸 인류사의 드라마는 텍스트 바깥으로 밀려난다.
이는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향신료의 역사는 곧 세계사의 축소판이며, 그 이야기 없이 향신료를 이해한다는 것은 맥락 없는 암기와 다르지 않다. 독자는 계피의 향을 알게 되지만, 왜 네덜란드가 실론(현 스리랑카)을 침략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후추의 매운맛을 설명받지만, 그것이 중세 유럽 귀족의 식탁에서 권력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은 누락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의도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감동을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라, 실천을 자극하는 참조 장치다. 향신료를 둘러싼 세계사를 살피기보다는 주방에서의 실험을 독자에게 돌려준다. 역사적 서사는 다른 책에 맡기고, 이 책은 지금 당신의 손에 쥐어진 향신료 통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집중한다. 그것은 겸손한 태도이며, 동시에 실용적 지혜다.
이 책은 읽는 책이 아니라, 맛을 상기하는 책이다. 서가에 꽂아둘 책이 아니라, 향신료 통 옆에 두어야 할 책. 오뚜기가 만든 이 책은 거대한 요리 철학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대중의 식탁을 조금 더 이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든다. 그 기획은 상업적이지만 동시에 교육적이다. 향신료는 더 이상 셰프의 비밀이나 미식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감각의 문장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은 독자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향신료를 구매할 때, 단지 맛을 사는 걸까? 아니면 우리 식탁에 아직 경험하지 않은 역사와 생물적 정체성을 불러들이는 걸까? 당신이 어떤 향의 뚜껑을 여는 순간, 그 질문은 이미 요리를 시작한 셈이다. 이 책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그 질문을 할 수 있도록, 언어를 건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