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의 사조 중 인상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처음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단어를 종국에는 그들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당당히 자리매김시켰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아는 만큼 보이는’ 르네상스, 바로크, 그리고 신고전주의와는 달리 ‘보려 하는 만큼 보이는’ 사조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보려 하는 만큼 보이는, 내가 보고자 하는 모습 그대로 내 마음에 들어차는 예술. 인상주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세종미술관을 찾았다.
가을날의 세종미술관을 장식하고 있는 전시의 이름은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이다. 그 이름답게 이번 전시의 컬렉션은 르네상스부터 시작해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 더 나아간 20세기 초 모더니즘까지를 포괄한다. 그러니 본 전시는 특정한 사조나 작가만을 염두에 두고 걸음했을지라도 그 너머 다른 여러 시대의 작가와 작품들까지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아는 만큼 보이는’ 사조다. 그리스 신화 내지는 성경 속 수많은 소재와 일화, 상징, 알레고리 등이 화폭 위에 다분히 의도적인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탓이다. 이들 사조에서 차용하는 소재와 상징은 모두 신화 그리고 성경이라는 공통된 샘에 기인하기에, 동일한 대상의 반복적인 재현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을 이루는 큰 줄기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상징이 서로 다른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는지, 그리스 신화 속 동일한 장면을 다룬 여러 작품이 어떻게 같으며 어떻게 다른지 - ‘동일한 대상의 이질적 재현’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은 이들 사조를 감상하며 누릴 수 있는 재미 중 하나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종교화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있다. 수태고지(Annunciation),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디트, 베드로의 부정과 유다의 배신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컬렉션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소재는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다.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한 명의 여성이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 다른 작가에 의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확인하며 ‘동일한 대상의 이질적 재현’이 선사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동일한 대상의 이질적 재현’이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핵심이기는 하나, 이는 비단 그들 사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일한 대상이 여러 사람의 눈을 거쳐 저마다의 방식으로 화폭 위에 꽃피는 전통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로코코 시대의 회화에서는 북부 이탈리아의 모습을 담아낸 풍경화, 특히 베네치아 인근을 화폭에 옮겨낸 풍경화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작품과 그 작품들의 답습 덕에 베네치아의 운하와 광장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게 느껴지지만, 이번 컬렉션에 포함된 프란체스코 과르디의 <남쪽에서 본 리알토 다리와 대운하>는 무수한 베네치아 회화의 홍수 속에서 단연코 가장 시선을 붙드는 작품이다. 다른 로코코 시기 베네치아 풍경화가 낭만화되고 정제된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과르디의 화폭 위 베네치아는 조금도 다듬어지지 않은, 지극히 현실적인 날것의 느낌을 주는 탓이다.
섬세한 아름다움이 곧 정도(正道)로 여겨지던 시기에 홀로 있는 그대로의 거칠고 진솔한 모습을 포착해낸 과르디. 그의 작품은 마치 둥글게 다듬어진 조약돌 속 홀로 날이 선 채 놓여 있는 나석과도 같은 기운을 풍긴다.
작품 설명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따금씩 마주칠 수 있는, 숨겨진 원석 같은 뒷이야기들을 무척 좋아한다. 이를테면 이 작품의 모티브가 실은 누구라거나, 작가가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따로 있다거나, 이 그림이 원래는 다른 모습의 그림이었다거나 하는 둥의 이야기. 샌디에이고에서 건너온 이번 컬렉션 속에는 신기하게도 검은 덧칠과 그 아래 숨겨진 원래 그림에 관한 사담을 품은 작품이 둘씩이나 되었다.
안토니오 디 벨리스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아래쪽 4분의 1 가량은 검은 물감으로 덧칠되어 가려진 상태였으나, 엑스레이 촬영을 통해 그 밑에 ‘무언가 또 다른 것'이 있음이 드러났다고 한다. 골리앗의 잘린 머리와 나뒹구는 칼은 그렇게 세상 빛을 도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작품의 설명란은 오직 현상만을 기술할 뿐 그 너머의 이야기까지 풀어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이는 보는 이들의 머릿속에 수많은 호기심을 낳는다. 작품에서 가장 강렬한 부분이라고 해도 무방한 이 ‘골리앗의 머리’는 어째서 검은 덧칠 뒤로 숨겨지게 되었을까? 억압 내지는 반감의 표현이었을까, 우연한 사고였을까, 그도 아니면 우리는 알 수 없었을 특별한 이유로 인한 작가의 변심이었을까? 안토니오 디 벨리스가 자신의 그림 속 가려진 골리앗의 머리가 드러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야코뷔스 프렐의 <앉아 있는 여인이 있는 실내 풍경> 역시 비슷한 종류의 물음을 자아낸다. 지금은 어두운 물감으로 뒤덮여 그저 그림자처럼 보이는 공간이지만, 본래 그 너머에는 침상에 누운 여인과 그녀를 돌보는 또 다른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작가가 침상 - 어쩌면 병상일지도 모를 - 의 여인을 검은 덧칠로 가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짐작만 해 볼 뿐 진실로 이유를 들을 수는 없지만, 도리어 진실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이 작품의 흡입력은 배가 된다.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섹션에서는 익숙한 이름들을 여럿 만나볼 수 있다. 쿠르베, 모네, 드가의 이름이 그간 전혀 접해 볼 수 없었던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신기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들의 옆에 걸려 있다.
잘 알고 있는 작가들의 낯선 작품을 마주하는 경험에 더해, 이곳 섹션에서는 그 전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작가의 낯선 작품과 마주치는 경험 또한 존재한다. 그간 몰랐던, 그러나 전시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가와의 마주침은 바로 시어도어 로빈슨의 작품이다. <약탈자> 라는 이름에 흥미를 느끼고 작품을 응시하면, 열매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는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이 어린아이가 약탈자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 작품이 왜 ‘약탈자’ 일까, 하고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몇 초 후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이 광경을 화폭에 담아낸 작가 역시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비슷한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뷔야르 부인의 흐릿한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는 순간을 상상해 보고,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몽퇴 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성정은 어땠을지를 어림짐작해 본다. 살아 본 적 없는 순간들, 만나 본 적 없는 사람들과 찰나간 맞닿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인상주의 미술의 선물이다.
본 전시는 일부 작품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다.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을 사진을 통해 되살릴 기회가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발터 벤야민적 아우라가 보존된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회화는 기본적으로는 공간의 예술이나, 동시에 시간의 예술이기도 하다. 그 회화를 접하는 순간을 잡아 둘 방도 - 이를테면 사진 - 가 없다면 그 작품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에만 오롯이 누릴 수 있는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사진이 없는 이 전시관에서 미술은 오직 그 순간에만 향유할 수 있으며, 내가 기억하는 대로 영원히 뇌리에 남는다. 해가 가기 전에 샌디에이고에서 먼 길을 건너온 작품들을 마주하며 오직 그 순간 그 때에만 느낄 수 있는 나만의 예술을 만끽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