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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애가 어느덧 5년 전이다. 다사다난했던 입대 과정, 전역 후 대학 편입 준비, 생계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 거기에 나의 개인적인 변명을 덧대어 아직 때가 아니라는 변명으로 회피한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다. 홀로 지내는 시간의 단점이라면 다소 외롭다는 것이고, 장점이라고 한다면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나만의 시간을 자유롭게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놈에게 시간까지 주어지니 물 만난 고기처럼 감성에 흠뻑 젖어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살았다. 다행히 어렴풋이나마 그 두루뭉술한 질문의 답을 찾아 눈 뜨고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니게 됐다.

 

‘나라는 사람을 일말의 자비도 없이, 가차 없이 부숴버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사랑이다. 아주 철저하게 파괴하는 사람이 사랑이다. 살아온 세월이 얼마이건 간에 그 시간만큼의 공을 들여서 쌓아 온 나라는 사람의 주체성과 정체성에 뜬금없이 커다란 구멍을 뚫어버리고서는 그 속으로 허락도 구하지 않고 비집고 들어오는 게 사랑이다. 정신 차리고 보면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들어앉아 내가 차곡차곡 쌓아 둔 것들을 전부 어지르고 헤집어 놓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모든 명제가 하나씩 부정당하면서 정체성이 흔들리고,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은 순간이 잦아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떠나지는 못하는 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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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 Kraft via Unsplash

 

 

왜 그 사람을 사랑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냥’ 또는 ‘그 사람이라서’와 유사한 답변 외에는 다른 말로 설명을 못 해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어야 한다. 나를 배려해 줘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해서, 예뻐서, 몸매가 좋아서, 애교가 많아서 등등 어떤 형태라도 구체적이며 상세한 서술을 더한 근거를 댈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당신은 나와 다른 그 사람이라는 타자를 온전히 타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 정체성에 기반한 나름의 틀에 끼워 맞추며 취사선택하고 있다. 나의 언어로 설명이 가능할 때까지 분해하고 또 분석해서 어떻게든 이해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계산이다. 지금까지의 나라면 분명 이런 행동을 참지 않았을 텐데 왜 이 사람에게는 그러지 못하고 여태껏 만나고 있나 싶음에도 마땅히 설명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게 사랑이다.

 

나의 마지막 여자 친구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는 장거리 연애 중이었다. 미술을 하는 사람들은 야간작업이라고 해서 새벽에도 연습실에 틀어박혀 작품에 몰두한다. 이 사람은 거기다 입시 준비까지 겹쳐 있으니 당연히 시간이 빠듯했다. 어쩌다 시간이 나도 30분 남짓을 볼까 말까였지만 그 잠시를 위해 1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기꺼이 이동했다. 극한의 효율성을 추구하며 살아오던 나에게 이런 비효율의 극치는 죄악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계획형 인간이라 예측 못 한 사건이 터지는 걸 정말 싫어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즉흥적인 생각에 이끌린 발화를 곧바로 내뱉는 사람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모든 행동을 전부 하고 있던 사람이라 피곤하기도 했지만, 이 사람과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기가 다 빨려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고서도 실실 웃는 나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살아 본 적이 있었나, 이럴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던가.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다. 내가 아닌, 나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낯설고도 이질적인 존재인 타자에 의해 스스로 내린 주체로서의 정의가 산산조각 나는 상호작용이 사랑이다. 그 부서짐의 순간은 경외일 수도 있고, 행복일 수도 있고, 혹은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더 단단해진 나와 그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계산이다. 그러니 말 못 할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한다. 자기 마음대로, 내 허락도 없이 나를 부숴놓고서는 그 파편을 들고 해맑은 웃음 하나로 고통을 날려버리는 사람을 만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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