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극장 연극과 뮤지컬의 매력 중 하나는 '극적 허용'의 범위가 너그럽다는 것에 있다. 대극장은 비싼 티켓값만큼 관객에게 완벽한 세계를 직접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중소극장은 그 기대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극적 허용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거나 비논리적인 상황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예술적 약속 그 이상의 것이다. 단순한 소품들이나 무대 효과가 남긴 표현의 공백을 관객들이 상상으로 채우면서 그 어떤 판타지도 구현해낼 수 있게 하는 장치이다.
예컨대 새파란 조명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파도 소리가 객석에 울려 퍼지면, 관객들은 자신들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는 허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아니, 그 허구는 이제 허구가 아니게 된다.) 또한 계단 하나 차이로 모래사장과 바다가 구분될 수도 있고, 가운데를 묶은 커튼이 거대한 물고기가 될 수도 있다. 뮤지컬 <청새치>는 이렇게 재밌고 탁월한 극적 허용들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의상 소품의 차이로 배우가 표현하는 인물이 달라지기도 한다. '밀러'가 스카프를 쓰면 '루소'로 바뀌고, '그레고리오'가 외투를 입으면 '에벌린'으로 바뀐다. 그렇게 배우들은 각각 두 명의 인물을 연기하며,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는 드라마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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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에 번번이 실패한 작가 밀러는 쿠바의 바다에 도착한다. 죽은 친구이자, 자신의 글을 유일하게 인정해 주던 사람인 에벌린이 같이 가서 글을 쓰자던 바다. 그녀가 밤마다 얘기했던, 밤하늘마저 아름답다던 그 바다였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도착한 쿠바의 바다는 그저 까맣고 깊은 파도만 있을 뿐이었다. 절망감에 바다에 몸을 던진 밀러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에 실패한다. 널브러져 있는 밀러를 그레고리오가 발견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레고리오는 쿠바의 바다에서 매일 쪽배를 모는 늙은 어부였다. 친구이자 동료 어부였던 루소를 죽게 한 청새치를 잡아 복수하는 것이 목표이다. 밀러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다시 죽음을 시도하기 위해 그레고리오에게 바다를 보고 싶다며 거짓말하고 배를 얻어 탄다. 그리고 깊은 수심에 다다른 순간, 배에서 뛰어내린다. 자신을 점점 아래로 짓누르는 바닷물 속에서 평온히 죽음을 맞이하려는데, 그레고리오가 그녀를 구한다.
이에 밀러는 정말 마지막 용기로 뛰어내린 거였는데, 네가 뭔데 나를 살리냐며 화를 낸다. 그러자 그레고리오는 감히 너 따위가 뛰어내릴 곳이 아니라며 밀러가 다시 죽으려는 것을 온몸으로 막는다. 그리고 내기를 제안한다. 오늘 밤 청새치를 잡는 사람이 이 배를 갖기로. 밀러는 내기에서 이겨 배에 구멍을 뚫고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제안을 승낙한다.
일련의 힘겨운 과정 끝에, 결국 그들은 함께 청새치를 잡는다. 그 순간 밀러는 떨림을, 그레고리오는 허무함을 느낀다. 그런데 청새치는 금세 도망가 버린다. 그레고리오는 얼른 다시 잡자며 서두르지만, 밀러는 "돌아가자"라고 말한다. 그러고서 왜냐고 묻는 그레고리오에게 더러 묻는다. 청새치를 잡았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느냐고. 그레고리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밀러는 잠시 동안 청새치를 만졌던 촉감을 생생히 기억한다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리고 에벌린이 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노래한다. "청새치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청새치는 그들에게 '상실한 친구'이다. 잠시 손을 스쳤다 이내 사라지고 말았지만, 여전히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나를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것. 지금 내 곁에 없어도 내가 떠올리기만 한다면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떠나지 못하게 잡으려고 힘겹게 노력할 필요 없이, 이제 기꺼이 놓아주어도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청새치를 잡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준다. 청새치는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지만,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마치 밀러가 자신의 글을 좋아해 주던 유일한 사람이 죽고, 글을 쓸 용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그레고리오가 루소를 죽인 청새치를 잡아 복수하기 위해 지겨운 배를 매일 몰았던 것처럼. 그럴 때 우리는 작살을 쥐고 있는 손의 힘을 풀 줄 알아야 한다. 검은 바다에 비친 거대한 그림자를 바라보는 눈의 힘을 풀 줄 알아야 한다. 청새치가 우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가 청새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청새치를 영영 잊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밀러의 말처럼 어차피 청새치는 나의 기억 속에 남아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있을 필요 없이, 내일을 향해 굳건히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레고리오는 또 한 번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자신이 청새치를 놓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오늘을 후회할지, 안 할지. 그러고는 말한다. "나는 내가 '후회한다'에 걸겠어." 밀러는 대답한다. "그럼 나는 '후회해도 괜찮다'에 걸겠어."
그리고 둘은 다음과 같은 가사를 노래한다.
후회와 좌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도
파도 역시 바다의 일부.
파도 없인 바다도 없다는 걸
오늘의 우린 알게 됐으니
파도 없인 바다도 없다. 고통 없는 인생은 없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 삶에는 저마다의 파도가 넘실거린다. 하나의 파도를 지나면 예상치 못한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온다. 어떤 파도는 유독 커다랗고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무언가를 후회하거나, 누군가가 너무 그리워 좌절할 수 있다. 근데, 그래도 괜찮다. 모든 파도는 결국 지나가 없어지기에.
주인공들과 함께 쪽배에 타 청새치를 잡고 놓아주는 여정이 즐거워, 첫 방문 이후 한 번 더 쿠바의 바다를 찾았다. 이 작품을 너무 늦게 알아서 더 많이 찾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 글에서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 '청새치'와 '쿠바의 바다' 때문에 알 사람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 "노인과 바다"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그래서 내가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원작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 나오는 소설 속 요소를 해석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둘이 내기를 시작했을 때였다. 이때의 대사가 굉장히 특이한데, 행동 지문이 인물들의 말로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밀러가 그레고리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달라고 한 상황]
그레고리오 : 비켜.
밀러 : 비키면?
그레고리오 : 알려줄게.
밀러 : 냉큼 비키며.
[그레고리오가 물고기를 잡은 상황]
밀러 : 그 물고기 너무 작은 거 아니야?
그레고리오 : 그 말에 째려보면.
밀러 : 모르는 척 다시 바다를 본다.
이렇게 대사에 일반적인 대화와 행동 지문이 섞여 있으니 캐릭터들의 귀여운 행동들이 더 돋보이고 물고기를 잡기 시작하는 단순한 장면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밀러가 힘들게 잡은 작은 물고기를 밀러 역 배우의 펄떡거리는 손바닥으로 표현하는 것도 웃음 포인트였다.
이렇듯 뮤지컬 <청새치>는 위트 넘치는 극적 허용들로, 상실의 아픔을 극복해나가는 장으로서의 바다를 그려내는, 재미난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재연으로 돌아온다면 극장에 찾아가 보길 추천한다. 그럼 능글거리는 귀여운 어부 루소가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네가 여기 온 건 우연이 아니야, 이 바다가 너를 부른 거지!"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neverending_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