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노동자, 노동운동, 노동계급. 산업화 이후 ‘노동’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것들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이미지와 역할이 있다.
땀과 흙이 묻은 작업복의 이미지. 매일매일 거대한 힘의 감시 아래 자신을 바치는 것. 그러나 부당한 대우에는 참지 않고 따져 묻거나, 호소하는 것. 머리띠를 질끈 매고 주먹 쥔 채 맹렬하게 외치는 소리 – 투쟁의 단호하고 당당한, 하나 된 목소리. 누군가는 이 모습을 정의로움, 사람됨의 표상이라 할 것이고 누군가는 지겹도록 끈질기다며 혀를 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뭉개져 버린 이미지의 원형은 어떠한가? 일을 하거나, 일을 찾는 과정으로 삶을 설계하는 우리 모두에게 ‘노동자’는 언제부터 ‘그들’이 되었을까? ‘그들’은 정말 우리의 관념 처럼 흔들림 없이 똘똘 뭉친 사람들일까.
우리 사회의 다양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 양상을 조망해 온 극단 수는 이번 <낭만적인 개소리>를 통해 노동 앞에 선 개인을 다룬다. 고공농성의 배경이 될 굴뚝이 한가운데 세워진, 천장이 높은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이 이들의 첫 무대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0월 18일 토요일, 나는 친구와 함께 서강대 캠퍼스의 언덕을 올랐다. 극장에 들어서자 만난 “미래차 비정규직 정규직화 한은순이 책임져라!”라는 커다란 플래카드를 뚫어지게 보며 이야기의 서막을 기다렸다.
왜 하필 나야
<낭만적인 개소리>의 주인공은 75m 높이의 굴뚝에서 1년째 고공농성을 이어오고 있는 노조위원장 고진옹이다. 함께 농성하다 얼마 전 내려간 동료(홍성호)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크게 동요한다. 이제 그만하고 내려가야 한다며 옆의 동료(허수인)에게 울부짖어 보지만, 그는 어떤 시련에도 꼼짝하지 않는 바위처럼 완강히 버티기를 고집한다. 둘 사이의 갈등이 고조될 때쯤, 회사로부터 합의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두 사람은 환호성을 지르며 지상으로 금의환향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사측은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며, 고소하겠다고 태도를 바꾼다. 해고노동자인 이들에겐 당연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 고진옹은 또 지옥 같은 고공으로 올라가서, 어느새 사람들에겐 지겨워져 버린, 목숨을 담보로 한 최후의 메시지를 또, 보내야 한다는 것인가.
고진옹은 자본의 무섭도록 딱 떨어지는 경제 논리와 ‘인간 존엄’, ‘노동권’과 같은 인문학적 단어가 주는 사명감을 두고 양자택일해야 한다. 동료들, 그의 아내마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은 상징이라고, 당신이 포기하면 안 된다고. 그리고 고진옹은 절규한다. “왜 나야!”
그러게. 왜 당신이어야 했을까? 왜 평생을 바쳐 일한 직장에서 쫓겨나듯 해고 통보받아야 했으며, 왜 노동조합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왜 1년이나 목숨을 건 싸움을 했음에도, 다시 이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앞장서야 하는 걸까. 왜 내 아들은 남들 다 가는 대학을 안 가도 좋다고 말하는 걸까.
꼭 나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문제는 간단해지고 고진옹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해고를 받아들이고 최대한 빨리 재취업하여 살길을 찾는 게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이니 굴복하고 살아가면 된다. 그러나 회사의 회유를 받아들인 고진옹은 되려 전보다 더 자유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배신당한 사람들의 원망과 회사의 압박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데에는 광기가 필요했다.
시야를 한참 뒤로 빼고 보면, 고진옹이라는 사람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거대한 구조의 충돌이다. 자본주의는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를 지워버리곤 하는데, 우리는 모든 고통과 행복을 경험하며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러니 고진옹은, 어찌 보면 운명적으로 그 싸움에서 인간성을 외치는 확성기 역할을 맡게 된 것이며, 한편으로는 매우 주체적으로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물론 절망 속에서는 그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낭만적인 개소리
여름밤, 한산한 마을, 어딘가에서 개소리가 들려온다. 낭만적으로 들린다. 아무도 듣는 이 없다 생각하지만 어딘가에서 응답할지도 모르는, 끊임없이 짖어대는 소리. 이 연극을 집필한 이미경 작가가 제목의 영감을 얻은 순간이라고 한다.
극 중 고진옹을 흔드는 말은 보통 이러하다 : “현실적으로 되어야 해”, “시대가 달라졌다고”. 나는 이 말들이 참 우스웠다. 수십 년을 살아온 현실이 말 한마디에 부서지고, 그런 일이 너무 쉽게 벌어지는 이런 시대에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는 사람보다 어떻게 더 현실적이고 시의적일 수 있단 말인가.
효과적인 사회운동의 방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가치가 이 사회에서 점점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슬프게도 느껴진다.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재단사들을 모아 노동운동 조직을 만들 때 ‘바보회’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에서는 그가 생각한 ‘바보’와 ‘현실주의자’라는 명칭의 모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이 바보인가? 노예로서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보인가?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혀있는 ‘약은’ 자들이 참된 현실주의자는 아니다. 체념하고 굴종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 수는 없다. 삭막한 겨울벌판의 나무둥치 속에서 내일 화사하게 피어날 꽃잎을 바라보고 오늘의 꿈이 내일의 현실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딛고 일어난 사람이야말로 참된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모두에게 바보라고 꾸짖음 당하는 일을 어떤 믿음만으로 이어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버티다 보면 언젠가 날아올 정의로 뭉친 ‘로보트 태권 브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연극이 보여주듯,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고 당당하지 않다. 매일 고민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나는 참 자주, 체념하고 굴종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갔을 이 지난한 갈등에 ‘그럼에도 옳기에’ 선택하는 길이 있다는 것은 곧 그 길의 가치를 증명한다. 그러니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외롭고 고통스럽지 않기를. 언젠가 이 길을 거니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당연해지기를. 이런 희망을 품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