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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장해제 시키는 이야기
뮤지컬 <레드북>은 보수적인 19세기 영국 런던에서 금기시되던 여성의 욕망을 전면에 드러낸 글을 쓴 ‘안나’의 이야기로, 그 어떤 무뚝뚝한 사람이더라도 무장해제 시키는 간지럼처럼(간지럼을 안 탄다면 유감이고), 당시의 금기를 깨기 위해서인지 유쾌한 분위기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유쾌한 분위기에 숨은 그림자를 봐버렸고, 그 순간부터 이 뮤지컬에 대한 감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그 그림자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처음부터 살펴보려 한다.
안나와 브라운, 자유와 법
먼저 안나에 대해. 안나는 노동자 계급의 여성으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한다고 말한다. 안나는 전에 귀족부인 ‘바이올렛’ 집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독신인 그녀에게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어 이웃 ‘헨리’와 이어준 적이 있을 정도로 이야기 능력이 뛰어난,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여성 인물이다.
뮤지컬은 바이올렛의 손자인 변호사 ‘브라운’이 남성 고용주의 성희롱에 맞서 싸우다 경찰서에 잡혀들어간 안나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브라운이 안나를 찾으려고 길거리를 떠돌며 수소문하는 첫 장면부터 안나가 주위 사람들에게 문란한 인물로 불리는 걸 보면 안나는 이미 사회에서 타락한 인물로 낙인찍힌 듯이 보인다(이야기는 그 말의 이면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브라운. 브라운은, 지금 말하기엔 좀 이르고 어불성설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법’을 상징하는 남성 인물이다. 브라운이 안나에게 바이올렛이 남긴 유산을 건네자, 안나는 바이올렛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브라운에게 이곳에서 꺼내달라고 또 일 맡길 것이 없냐며 도움을 청한다. 바이올렛이 가족도 아닌데 유산을 남길 정도로 안나라는 여성을 각별하게 여겼던 이유가 궁금했던 브라운은 ‘신사답게’ 그녀를 경찰서에서 꺼내줄 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에서 타이피스트 자리를 마련해주어 호의를 베푼다.
안나와 브라운의 충돌
브라운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걸 하며 살라고 독려하는데, 그 말에 감동한 안나는 서점에 들러 바이올렛과의 과거를 회상하다 잡지 <레드북>을 판매하려고 온 여장 남자 ‘로렐라이’를 만난다. 홀로 외로이 이야기를 상상하곤 했던 안나는 ‘로렐라이’가 이끄는 여성들의 글쓰기 모임 ‘로렐라이 언덕’에 가입해 글쓰기 세상에 빠져든다.
어느 날, 브라운은 한 부부의 이혼 사건을 의뢰받는데, 승산이 없어 보여 고민한다. 이혼을 요청한 의뢰인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결혼하면 평생을 사랑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했던 데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에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증거가 명백해도 여성의 주장으로 이혼은 어려울 거라 생각해 망설인 것이다. 이런 고민을 안나에게 말하자, 안나는 그게 왜 안 되냐며 사랑은 날씨처럼 변하는 것,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 얘기에 의아해하던 브라운은 안나가 타이핑한 종이를 찾으려다 그녀가 바이올렛과 헨리에 관해 쓴 이야기를 보게 된다. 예상 밖의 화끈한 이야기에, 브라운은 할머니에 대한 모독이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반면, 안나로서는 바이올렛의, 바이올렛을 위한 이야기를 보고 브라운이 그런 반응을 보여 황당할 뿐이다. 감당하지 못한 브라운은 결국 안나를 사무실에서 내쫓는다.
이 장면을 그럼 그렇지, 하고 넘어갈 사람이 있을까? 이 장면을 당대 현실에서 억압되었던 여성 인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남성+법이 여성+자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영역에서 쫓아낸 것이라고. 이후에도 법과 자유는 이런 식으로 부딪히게 된다.
안나의 성공과 위기
쫓겨난 안나는 로렐라이 언덕에서 여성들과 함께 글에 매진하고, 3개월 후, 첫 사랑 ‘올빼미’에 대한 소설이 수록된 <레드북>을 발간하게 된다. 그들은 서점 유통 대신 길거리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직접 책을 파는 방식을 택해 큰 인기를 얻는다. 여성들은 성적 욕망과 여성 신체가 묘사된 솔직하고 가감 없는 안나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고, 몇몇 남성들은 얼굴을 감추고, 아내나 딸을 단속하기 위해 읽는 거라며, 호기심에 레드북을 사 읽다가 그 매력에 빠진다. 이처럼 법의 영역 밖에서 활보하는 자유는, 그동안 자유를 느끼지 못하던 여성들에게는 자유로움을 안겨주고 위풍당당하던 남성들에게는 부끄러움을 안기는 식으로, 브라운이 안나에게 면박을 주고 내쫓았던 변호사 사무실의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통쾌함을 선사한다.
레드북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보니 그 책의 이아기는 유명한 평론가 ‘딕 존슨’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존슨은 레드북에 대한 평론을 쓰고 싶다며 안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커리어의 정점에 오를 수 있는 기회. 그 전에 안나는 빌렸던 돈을 갚는다는 핑계로 잠시 브라운을 만나러 간다. 처음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점차 좋아하게 되어 이혼 재판에서도 사랑의 변화에 대해 말하며 재판관을 설득했던 브라운, 안나에게 미련이 있어 레드북에 실린 안나의 소설 <낡은 침대를 타고>를 읽었던 데다, 여장을 하고 로렐라이 언덕까지 찾아갔었던 브라운. 그러나 그는 상황을 잘 수습하지는 못할망정, 외려 안나에게 이야기에 나오는 ‘올빼미’라는 남자가 자기 아니냐며, 자기 이야기를 마음대로 쓴 거냐고 오해의 드라마를 펼치고, 안나는 그럼 그렇지, 하며 돈을 두고 나간다.
이제 문제의 장면이 펼쳐진다. 존슨의 집에 찾아간 안나. 안나가 공손하게 대하자 존슨은 대뜸 안나에게 글을 잘 쓰려면 뮤즈가 필요하다며, 자기를 뮤즈로 쓰라고 제안한다. 즉 성적인 관계를 요구한 것이다. 그는 골반을 흔들며 뮤즈, 뮤즈 노래를 부르며 안나에게 다가간다. 이에 기겁해서 거절하고 나가려던 안나는, 그가 안나를 가로막고 흉한 행동을 보이자 그의 가랑이를 걷어차고 그의 집에서 뛰쳐나간다. 상당히 경쾌하고 웃기게 그려져 있지만 현실이라 생각하면 굉장히 무서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난 이 장면에서부터 그림자를 보았다. 마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아니 웃을 수가 없는, 안나를 털털하고 쾌활하며 솔직한 성격으로 그려서 상대적으로 약하게 드러나는 그 그림자를.
그렇게 도망친 안나, 그리고 안나를 걱정하며 찾아온 브라운이 만나 서로의 진심을 전하는 식으로 둘은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이야기는 이제 심각해진다. 존슨이 자신의 남성성을 훼손시킨 안나의 폭행을 문제 삼고, 평론가인 자신의 역량으로 레드북이 문란한 이야기라는 레드북 퇴치 운동을 벌이며 그 잡지를 낸 로렐라이 언덕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남성이라는 이점과 권력을 가지고서 안나를 이중으로 억압하려는, 굴복시키려는 심산이다. 이때 상당히 놀라운 지점이 있는데, 여자의 정당방위 자체가 타당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안나는 체포되어 재판을 앞두게 된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법과 자유의 충돌. 실은 법이 설치한 덫에 걸린 자유. 이제 안나에겐 두 가지 길이 놓인다. 브라운이 제안한 대로 심신미약 상태에서 그런 글을 썼다며 감형을 받는 길, 또는 끝까지 멀쩡한 상태로 그 글을 썼다고 말해 자국에서 추방되는 길. 이 두 가지 길은 길거리를 활보하던 자유를 체포한 법이 내민 두 장의 카드다. 한 장은 자유가 법에게 굴종하는 카드. 나머지 한 장은 자유가 법의 영역에서 추방되는 카드. 아주 제한된 자유를 누릴 것이냐, 아주 밖에서 불확실한 자유를 누릴 것이냐의 갈등. 씁쓸하게도 자유가 죄가 되고 벌로 이어진다는 부조리와 카드를 고르지 않는 선택은 여기서 논외다.
안나는 동료들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상태에서 글을 썼다 말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에는 이야기 초반부, 자신과 같이 경찰서에서 하루를 보냈던 거지 여자아이가, 지금 이 장면에서 다시 안나에게 찾아와, 안나의 글을 읽었다며, 거기서의 자유가 너무 좋았다고 말하며 안나를 응원한 게 한몫한다. 현실이 아무리 냉혹해도 그 아이에겐 이야기의 여운처럼 감도는 자유라는 가치가 중요했던 것이다. 결국 안나는 이 뮤지컬의 핵심 곡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부른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중에서
이 뮤지컬을 보기 전부터 좋아했던 노래인데 이런 서사를 알고서 보게 되니 가사가 남다르게 와닿았다. 흔들리지 않는 나를 말하고 추구하는 노래. 안나의 상징으로 바꿔 말하자면 자유롭기 위해 자유를 말하는 자유의 노래. 어떤 현실 앞에서도 안나는 자신이 자유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선언한다. 그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건 자신과 같은 가치, 자유를 믿는 사람이 있어서다. 자신이 믿고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것은 외로우나 나의 진실과 가장 가까워지는 방법이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
안나의 변호를 맡은 브라운은 어떻게 하면 재판에서 이길 수 있을지 궁리한다. 이제 그에게 안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 더더욱 이해해 보고 싶은 존재다. 초반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 그는 자유와 법이 서로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 한다. 그때, 오랜만에 헨리가 찾아와 브라운에게 말한다. 이야기를 들어주라고. 좋아하는 상대의 이야기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라는 의미.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자유에 귀기울이라는 당부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재판이 시작된다. 예상대로 안나가 자신은 멀쩡하다는 주장을 펼치자, 브라운은 반박당하기 쉬운 논조들로 변호를 시작한다. 남성 작가도 그런 이야기를 쓴다. 그건 남성이니까(반박1). 타국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쓴다. 그건 타국에서의 일이니까(반박2). 그런 반박들은 재판이 오로지 지금 이곳을 기준으로 판단하겠다는 뜻이 되는데, 그건 브라운을 곤란하게 하지 않고 그를 돕는다. 그는 수많은 여성한테 들은 레드북에 대한 감상을 증거로 내민다. 그 어디에도 사람들이 우려한 악영향은 없다. 사람들은 안나의 이야기를 읽고 추억에 잠기거나 진솔한 감정을 느끼는 식으로 공감했다. 욕망과 거침없는 묘사가 들어있지만 사람들은 거기서 자신과 연결되는 가치를 발견했고 거기에 공감한 것이다. 그 가치란, 안나가 선언한, 안나 그 자체인 자유다.
말하고 들어주었더니 생긴 일
브라운의 변론을 들은 재판부는 이야기 완결 때까지 결정을 유보하겠다는 판결을 내린다. 안나에게 끝까지 이야기를 쓰라는 의미이자 끝에 이 이야기가 어떤 가치로 남게 될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 그리고 안나를, 이곳에서의 자유를 인정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전까지 계속되던 법과 자유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해소하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나로서는 해결 방법이 없는 건 아닐까, 분열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우려했었는데, 자유는 자유를 말하고 법은 자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 된다는 걸 알게 되어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기뻤다. 자유는 계속해서 자유를 외치고, 법은 계속해서 자유의 목소리를 들으며 울타리를 넓히고 고치는 식으로 사회가 돌아간다면 개인과 타인의 공생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 뮤지컬에서 불현듯 보았던 그림자는 그런 방식으로 빛의 마당에 뛰어들었다. 그 마당에서 안나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쓸 것이고, 브라운은 마음껏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며, 많은 사람이 그들과 이야길 나누려고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이야기 속 가치에 공감하며 연결되던 순간의 환희.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느끼고 삶을 붙잡은 이들이 주는 신뢰. 말하고 들어주는 일에서 생겨나는 공감과 신뢰는 파문처럼 멀리멀리 퍼진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나와 당신들의,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로 빛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