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은 때로는 아름다운 형상을 담아내지만 때로는 그 이면의 것, 이를테면 대상의 양면성 혹은 현실, 어둠을 조명하기도 한다. 10월 13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에서 초연의 막을 올린 연극 <낭만적인 개소리>는 단연 후자에 속한다. 이미경 작가와 구태환 연출, 그리고 극단 수가 만나 비로소 탄생한 해당 연극은 노동자와 권력자의 첨예한 대립을 제시하며,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충돌(衝突)
본 연극을 오직 한 단어로 설명해야 한다면 고민 없이 ‘충돌’을 꼽겠다. 이는 개인의 내면에서,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굉음을 내며 그 존재를 확연히 독자에게 전달한다.
충돌의 서막은 지상으로부터 75미터 위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고진옹과 동료 허수인은 굴뚝에서 1년이 넘도록 고공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미래차 비정규직 정규직화 한은순이 책임져라!”
굴뚝에 걸린 현수막의 문구, 이들은 회사의 불합리를 알리고자 그곳에 올랐다. 지상에서 회사와의 협상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무려 1년 동안 그 열악함 속에서 생활한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버텨내던 그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보다 먼저 내려간 동료 홍성호가 얼마 가지 않아 자살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에 노동조합의 행동에 앞장서던 진옹은 흔들린다.
울리는 전화음은 회사와의 협상이 무사히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마침내 농성을 마치고 돌아온 노동조합. 그러나 이는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회사의 명예를 훼손한 대가라며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고, 국회의원 안상태는 진옹을 찾아와 너만은 살려줄 테니 노동조합을 해체하라고 권한다. 하물며 진옹의 아내로부터 하나뿐인 아들이 집안 사정을 고려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때 진옹은 다시금 내면의 충돌을 느끼게 된다. 회사의 횡포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동자, 그럼에도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 개인의 자아는 해당 극의 중심이 되는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진옹의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는 주변인과의 마찰, 그리고 여전히 지속되는 노동자와 기업 간의 대립. 그 혼란 속에 주인공 진옹이 있다.
우리는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극 중 권력자의 입을 통해 묘사되는 사회는 지나치게 냉랭하다. 그러나 더욱이 나를 씁쓸하게 했던 것은 그 풍경이 지나치게 현실이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상태가 말하는 ‘노동조합을 향한 사람들의 인식’ 같은 것.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싫어한다”라는 말, 그 뒤에 따르는 “툭하면 파업하고, 기업 주식은 떨어지므로”라는 이유. 나는 그 순간만큼은 무대를 응시하는 관중이 아닌 현실 속 군중 중 하나였다. 권리를 챙기는 행위가 그저 위선이자 정의 구현으로 취급되는 세상, 사람들은 이면을 들여다보기 보다 그 움직임으로 인한 불편함만을 살핀다. 그렇기에 이 사회에서 투쟁하는 자들은 단지 ‘피곤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극이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회의 모습은 지극히 사실의 것이었다.
“낭만적인 개소리”
극 중 농성을 이어가던 진옹은 모두 해결될 것이라는 말이 ‘낭만적인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외친다. 열악한 환경 속 고공농성을 거듭하며 피폐해지는 신체와 정신,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던 일 년간 그가 느낀 것은 다름아닌 허무였으리라. 한때 ‘결국 잘 해결될 것’이라는 꿈을 꾸며 온 힘을 다해 투쟁했던 그가 ‘모두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까지의 과정은 너무나도 이해가 되는 것이라 내게 진옹은 악인도, 선인도 아닌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느껴졌다. 벽에 어렴풋이 비추어지던 그의 그림자는 저 나름의 고단함을 살포시 전해주는 듯해서, 나도 모르게 외로워졌고, 고뇌했다.
그럼에도 진옹은 굴뚝으로 돌아간다. 몇 번의 냉소를 지나서 결국 제자리로. 그리고 무대에는 성호가 로보트 태권V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초입부터 연신 재생되었던 ‘로보트 태권V’는 극의 중요 장치 중 하나이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단순히 웃기다는 표현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투쟁을 거듭할수록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고 싶어지는 마음들,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잃지 않으려 노래하고 춤을 추는 이들.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은 전소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자 굴복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지를 보여준다. 현실과 대비되는 음악이 주는 역설과 아이러니는 극장을 떠난 후에도 한동안 내 안을 부유했다.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 고단함. 연극 <낭만적인 개소리>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당장 커다란 변화는 이끌어내지 못할지언정 침묵하지는 않으려는 연극, 본인만의 시선으로 당당히 어둠을 조명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이 가진 또 다른 힘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