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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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눈앞의 대상을 적 아니면 친구, 둘 중 하나로 빠르고 명확히 규정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원시의 관습이 이어져 내려온 탓일까? 세상의 수없이 많은 관념들은 ‘A 아니면 B’라는 깔끔한 이분법을 택하고 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낮과 밤. 우와 열. 아군과 적군.

 

그러나 수작이라고 꼽히는 영화의 반열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대개 이분법적으로 받아들여지곤 하는 관념의 대상을 양분하는 아주 가느다란 ‘경계선’ 위에 정확히 닻을 내린 작품들이 여럿 존재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계선을 포착한 <엘르>, 부자와 빈자 그리고 선과 악이 모호해지는 경계선을 잡아낸 <기생충>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이들 영화는 낮과 밤의 명징한 이분법을 택하는 세계에서 빛과 어둠이 교묘하게 뒤섞인 ‘새벽'의 존재를 포착해내는 작품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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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울의 아들> 역시 그러한 새벽의 목격자다. 1994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산 자와 죽은 자, 선의와 악의, 진리와 아집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계선을 가장 주관적이고도 현실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영화 속에는 수많은 개념의 대립쌍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장면이 다수 등장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유대인 수용소는 삶과 죽음이 한 끗 차이로 갈리는 장소이다. 수용소 안의 유대인들에게 내밀어지던 ‘깨끗한 샤워’와 ‘샤워가 끝나면 기다리고 있을 따뜻한 수프’라는 제안은 순식간에 ‘가스 샤워’와 ‘샤워가 끝나면 기다리고 있을 차가운 시신 더미’라는 기만으로 변하고 만다.

 

영화 내내 주인공 사울은 죽은 유대인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 여기고 아이의 장례를 치러 주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위한 그의 노력은 도리어 산 사람들을 죽음의 위험에 밀어넣는 역할을 한다.

 

사울이 유대인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산 자의 희생을 등에 업은 채 마지막까지 살려낸 유대인 랍비는 사실 기도문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가짜 랍비다. 사울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며 지키기 위해 애를 썼던 사내아이의 시신은, 실은 그의 아들이 아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관객들은 산 자와 죽은 자, 진리와 허구, 선한 의도와 악한 결과가 이리저리 뒤섞인 흙더미 위에서 무엇이 무엇인지 결국 ‘규정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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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사울은 경계선을 밟고 서 있는 사람이다. 사울은 유대인인 동시에 수용소에서 같은 유대인의 시신을 처리하게끔 동원된 ‘존더코만도’이다. 이들 존더코만도는 유대인(피해자)와 나치(가해자)를 가로지르는 경계선, ‘곧바로 죽음에 이르는 자’와 ‘죽음이 예비되지 않은 자’를 가로지르는 경계선 위에 놓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대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돕고 있지만 언제고 그 자신이 죽임의 대상이 될지 모르는 자들로, 사울이 구덩이에서 찾아낸 랍비를 숨기기 위해 존더코만도의 옷을 벗자마자 ‘처리 대상'으로 오인되어 구덩이로 끌려가는 장면이 이들의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X자 표식이 그려진 볼품없는 옷 한 장이 그들의 존엄성과 자격의 전부인 것이다. 그 한 장의 옷을 벗는 순간 이들은 가느다란 경계선 위에서 끌려나와 피해자의 쪽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이러한 영화의 ‘경계선 포착’은 우리가 가진 기존의 두 가지 분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대상을 제시한다. 사울의 믿음은 유대식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신성한 일념’과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모한 고집’ 중 어느 편에 속하는가? 사울은 생판 모르는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착각한 미치광이인가, 홀로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나치에 대한 개인적 항쟁을 벌이는 용감한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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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돋보이는 연출은 단연 중심 인물을 프레임에서 결코 빼놓지 않으며 누군가의 ‘시선'을 대변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앵글의 쇼트, 그리고 철저히 배제되는 헤드 룸이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울을 따라가며 흔들리는 카메라워킹, 블러 처리된 주변 전경, 수많은 소리의 혼합과 역광의 활용, 확보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헤드 룸을 통해 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사울이 역광이나 그림자에의 노출 없이, 헤드 룸이 확보된 안정적인 구도로 스크린에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바로 부검실에 몰래 빼돌려 놓은 남자아이의 시신 앞에 오롯이 서는 장면이다. 이는 다른 모든 대상이 경계선을 넘나들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사울이 아이에게 느끼는 인도적 감정’만은 경계를 넘나들지 않는 명확한 진실임을 뜻한다. 바로 그 순간만큼은 그 아이가 사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이다.


숲 속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을 정지된 시선에서 포착하는 모습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숲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아이를 정지된 시선에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 수미상관의 구도는 무감한 듯 인도적인, ‘무정한 휴머니즘’의 시선이다. 모든 이분법의 대상이 영화 내내 이리저리 뒤섞이는 와중에도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이 지극히 무감하면서도 지극히 따뜻한 시선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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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아들>은 낮과 밤이 혼재하는 새벽을 그 어떤 판단도 개입도 없이 그저 관객의 눈앞에 펼쳐 놓는다. 누군가 이 영화를 일컬어 ‘아집과, 악의와, 허구에 관한 이야기’ 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것이다. 아무튼 새벽을 일컬어 밤이라고 말한들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동시에 누군가 이 영화를 일컬어 ‘신념과, 선의와, 진리에 관한 이야기’ 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것이다. 새벽은 아침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주장한들 마찬가지로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 상반되는 관념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아득히 뛰어넘어 존재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통틀어, ‘지극히 무감하면서도 지극히 따뜻한 시선’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듯이. 비록 찰나일지 모르나 사울이 사내아이의 시신을 온전히 마주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사내아이가 사울이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듯이.

 

그러니 이 영화는 가느다란 경계선 위에 선 사람이, 경계선의 양쪽을 둘러싼 두 대상에서 눈을 떼고 경계선 저 멀리 위의 아득한 무엇으로 마침내 시선을 돌리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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