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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재조명]

어떤 대상의 의의나 가치를 다시 들추어 살핌


익숙한 대상과 사건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당연함에 가려졌던 그 가치를 재조명한 작업입니다

 

 

구둣발로 뱅글이(‘뱅글이’의 정식 명칭은 허리돌리기 기구. 뱅글뱅글 돌아가서 그냥 ‘뱅글이’라고 부르고 있음)를 탔던, 미세하지만 평소와는 달랐던 그날을 말하기 위해서는 혼자 결혼식에 다녀온 어느 긴긴 낮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너무나 길었던 생낮의 토요일. 멀끔하게 차려입고 카페에 돌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그날의 나를 또렷이 기억한다. 간만에 구두를 신은 탓에 뒤꿈치가 쓸려 신경쓰였지만 내겐 따끔거리던 그 감각보다 불현듯 찾아왔던 위기감이 훨씬 더 선명했다. 그건 전날부터 착실하게 빌드업된 복잡한 심정일 수도 있겠다.

 

“남 축의금만 내다가 끝나겠네”라는 엄마의 단골 멘트를 들어도 타격이 없다가 그 다음 멘트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안 그런 거 같아도 다들 순리에 맞춰 살아.” 이상하게 ‘순리’라는 단어 앞에선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사나 싶어 기가 팍 죽다가 다들 제짝 찾아 떠나고 나만 최후의 일인이 될 것 같아서 닭살이 돋는다. 웃픈 건 이러다 정말 그동안 뿌린 축의금을 회수 못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속 좁게 울컥한다는 거다. 그런 것들과 실랑이를 벌이면 결국 현 좌표에 대한 의구심까지 들게 되고 만다.

 

‘나는 대체 어디쯤에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예식까지 두 시간이나 떴는데 출발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져 버렸다. 사정이 생겨 못 갈 것 같다는 지인들의 연락까지 겹쳐 본의 아니게 멍을 더 때리게 됐다. 혼자 참석하게 됐지만 프로 하객으로서 할 도리는 다한다. 축의금-신부와 사진 촬영-친구 부모님 뵙고 인사드리기-축하 박수 치며 식 참석하기-식권 챙겨 야무지게 밥 먹기 코스를 무난하게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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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돌아가는 길이었다. 식장을 빠져나오며 축하하는 마음 아래에 꾹꾹 눌러 두었던 무언가가 탕 하고 풀려 버린 것이다. 차를 놓치면 텀이 꽤 있었기에 일단 터미널로 향했다. 머리가 헝클어질까 봐 편히 기대지 못했던 버스 좌석에 몸을 푹 끼워 넣었다. 눈을 감고 좀 느슨해지려는데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서글픔에 가까웠던 그것은 꼬꼬마 시절의 한 장면을 뜬금없이 기억나게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년 대표로 모범어린이상을 받으러 운동장 조회대에 섰던 날. 상장을 들고 내려오는데 상장 속 이름 한 글자가 잘못 표기되어 있었다. ‘세’가 어떻게 ‘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담임선생님께 내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어? 그러네? 어쩔 수 없지 뭐”였다. 이제 막 공식적으로 모범어린이가 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가슴에 묻기로 했다. 그날 하루는 그래서 ‘제희’가 되었다.


이름을 고쳐 달라고 강력하게 밀어부쳤다면 온전한 이름이 적힌 상장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분명 내 품에는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애매한 기운의 상장 따위는 들려 있지 않았을 거다. 김이 팍 샜다. 자랑스러운 날인데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나의 날인데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애매함은 부지런히 시간을 먹고 자랐다. 명확한 구분선 없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하루들이 꼭 ‘제희 사건’의 연장선 같았다. 별다른 진전 없이, 이렇다 할 반전도 없이 삶을 굴려 나가는 기분 속에서 정말로 한번은 시원해지고 싶었다. ‘그래. 지금이다. 결혼식에 다녀왔을 뿐인데 하루가 다 가 버린 이 허무한 주말 저녁이 바로 그 타이밍이다!’ 답답했던 나는 남은 하루를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산뜻한 엔딩. 그게 필요했다. 이렇게 시든 배춧잎 마냥 축 쳐져서 하루를 땡칠 수는 없었다. 주인공이면 진짜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스스로를 채근하며 집으로 올라가는 길, ‘뱅글이’가 보였다. 서너 개쯤 모여 있는 운동 기구들 사이로 뱅글이가 눈에 들어왔다. 일종의 계시, 그건 타라는 얘기였다.


뱅글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걸리적거리는 핸드백은 잠시 옆으로 치우고 돌림판에 올라탔다. 발꿈치로 통증이 쏠렸지만 사실 마음이 더 피곤했기에 그 정도는 괜찮았다. 아이고 아이고....뻐근해진 몸에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얼굴은 뭐 넋이 나가 있었고 그저 손잡이를 잡고 허리를 좌우로 비트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다.


‘지금 이 장면 언젠가 내가 꼭 써먹는다!’


세상 불편한 차림으로 영혼 없이 운동 기구를 타는 내 모습을 훗날 써먹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 알 수 없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복잡한 모든 감정이 자연스레 납득되었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가 재생되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두드러지는 하이라이트 같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상한데 곱씹을수록 멋지고 슬픈 신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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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으로 뱅글이는 유용했다. 이토록 자질구레한 신(scene)이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그 안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세우게 됐으니 말이다. 내가 나에게 조명을 비추는, 그러니까 셀프 뮤비를 찍는 날이 점점 늘어 갔다. 요즘은 힘들 때 ‘지금 나는 MV 한 편을 찍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자주 꺾이고 자주 힘내는 사람은 겨우 뱅글이를 타며 파이팅을 도모한다. 조바심 때문에 늘 종종거리지만 그만큼 희망도 잘 느끼는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고 이 글에 남긴다.

 

어쩌다 한 번 뜨겁고 대체로 미지근한 온도의 인간인 나는 위와 같이 어정쩡한 장면이 눈에 잘 밟히는 편이다. 내가 정말로 써야 하는 건 그런 장면이 아닐까 고민한다. 책을 읽다 인상 깊은 문장을 만나면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는다. 그런 마음으로 언젠가 써먹을 장면들을 접어 둔다. 모서리 접어 두었던 일들을 다시 펼칠 때 약간의 부끄러움을 동반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언젠가는 모두 꺼내 놓고 싶다.


아직은 MV를 조금 더 찍어 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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