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왕복 2시간을 출퇴근하는데 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출퇴근 길에 탑승하는 만원 버스가 유난히 힘들게 느껴진다. 그중 가장 싫은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닿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여러 사람이 부딤히는 이 공간에서 내가 많이 예민해졌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겠지만, 지금 나에게선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증표가 바로, 내가 겪는 불편함의 탓을 '남'에게 돌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중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나의 감정을 남에게 투영해내고 있다'라는 사실을 적어도 인지하고는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오랜 시간 내가 상담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래, 나는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이제 내 마음을 돌아볼 때가 된 것이다. 그때 펼쳐보게 된 책이 바로 <파리의 심리학 카페>다.
이 책은 모드 르안이라는 심리학자가 심리학 카페를 운영하며 만난 사람들이 가진 삶의 궤적들과 그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그 궤적들을 5개의 챕터-감정, 상처, 사랑, 관계, 인생-로 분류하여 삶의 각기 아픈 굴곡들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나는 그중 마지막 장인 '인생' 챔터가 눈에 들어왔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
상담을 다닌 지 연식이 꽤 되다 보니, 상담받을 때 나도 모르게 내가 상담가처럼 나의 삶을 먼저 해석해서 내 이야기를 상담가에게 전달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그중 대표적인 해석 습관이 바로, 현재 내 고통의 원인을 과거의 상처로부터 규명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은 과거에 어떤 고통과 부당함을 겪었기 때문이야.'리고 여기는 경향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통에 대한 원인이 해명되니 당장에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결과적으로 고통을 증가시킨다. 지금의 고통이 바뀔 수 없는, 과거라는 고정된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일까? 현재 고통의 원인을 과거로부터 규명해내면 해명은 되지만 고통은 가중된다. 그런데, 현재 고통의 원인을 과거의 상처로부터 찾아내지 않아도 고통은 가중된다.
이에 대해 모드 르안은 다음의 비유를 들어 이 딜레마를 극복해나가도록 해준다. 즉, 우리가 끊임없이 과거를 곱씹는 것은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계속 같은 페이지의 책만 읽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과거의 특정 상처가 현재의 모습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마치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신분증처럼 여기면서, 역설적으로 지금의 고통과 과거의 상처 모두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미래라는 새 책을 열려면, 과거라는 책의 장을 덮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한다. 프로이트의 말을 가져와 저자는, 과거라는 이미 출판된 책을 바꿀 순 없지만, 현재의 선택에 따라 지금과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지난 과거의 상처를 부정할 필요도, 그렇다고 그것에 너무 메여있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묵묵히 들여다보고 인식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조종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이제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갈 수 있을 뿐이다.
「여태껏 너무 많은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심한 여드름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20대가 되어서도 내 피부는 좋아질 생각이 없었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까?'라며 좌절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외면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기에,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나의 내면을 잘 가꾸어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안도감의 마음도 들었었다.
그렇게 한참 사춘기가 심하던 고등학생 때와 20대 초반의 나는 내 피부가 스스로 결점이 많다고 생각했던 나머지, '내면을 키우는 것만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아오게 되었다. '외면은 선물의 포장지와 같은 것인데, 왜 사람들은 정작 선물의 내용물과 같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외면에만 관심을 가지는 걸까?'라며 편향되게 생각했던 나날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20대 중후반이 되어 피부도 조금씩 진정되고 정식으로 사회생활도 처음으로 하게 되다 보니, 내면 못지않게 외면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짧은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동시에 그 사람을 파악하기까지 해야 한다. 그렇기에 사회인으로서 좋은 인상, 아니 적어도 비호감의 인상을 주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호감형의 외면을 가지도록 가꾸어가는 것도 분명 중요하다는 생각이 납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모 가꾸기'는 종착지 없이 계속해서 달리는 기차와 같은 것이었다. 예전처럼 청춘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피부의 모습은 지나갔음에도, 우둘투둘하고 매끄럽지 않은 내 피부는 여전히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가다 피부가 좋은 사람을 지나치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눈이 가고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모드 르안의 비유는 다시 한번 내가 잊고 살았던 '포장지와 내용물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도록 일깨워주었다. "포장지는 내용물을 돋보이게 하고, 선물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 준다. 그러나 선물 없는 포장지는 무가치하다. 포장지는 제 역할을 할 때에만 그 아름다움이 빛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모드 르안은 외면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본성상 외면에 치중하게 되는 경향을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면과 내면을 가꾸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도 드러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내부에서 발현된 자기 고유의 멋을 굳건히 키워가는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한 사람이 걸어온 삶의 깊이에서 드러나는 인생의 나이테는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그 사람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귀중한 가치가 될 것이다.
20대를 지나 30대가 되고 나면서부터 많이 바뀐 생각은, '인생에 정답이 없음을 진실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조금 어렸을 때는 이쪽의 가치만이, 혹은 저쪽의 가치만이 옳은 것이라고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쪽의 가치도, 저쪽의 가치도 옳을 수 있음을 겸손히 깨달아간다.
그렇기에 인생이 쉬워지면서도 동시에 어려워진다고 본다. 하지만 비단 어려움이 존재해야 문제를 풀고 해답을 찾았을 때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기 마련이니, 과연 실로 인생은 '포장지와 내용물 사이의 균형 잡기 투쟁'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