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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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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이들>은 한 여자가 코피를 흘리며 아이들의 안부를 물으며 시작한다. “애들은 잘 지내?” 묻는 쪽은 로즈, 잘 지낸다며 대답하는 쪽은 헤이즐이다.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 관계인 이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나간다. 옛 인연들, 나이 든다는 것… 그러나 대화 속에서 튀어나오는 ‘폭발 사고’, ‘발전소’, ‘출입금지구역’ 같은 단어는 관객에게 지금이 원자력 발전소 사고 후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이 있는 오두막은 원자력 발전소 사고 후 출입금지구역 근처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극중 배경은 공연 장소의 특징과 맞물려 관객에게 더 생생하게 다가간다. 초연이 극장에서 이루어졌다면 이번 재연은 ‘abnormal필운’이라는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주로 전시나 모임 장소로 쓰이는 곳으로, 공연이 시작하는 6시가 되면 근처에 있는 성당에서 종이 울려 관객은 종소리와 함께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무대조명 없이 통창으로 들어오는 해질녘 자연광과 휴대용 조명을 사용하기에 실제 원자력 사고가 일어난 현장에 와 있는 듯하다. 소품이나 세트를 활용하는 대신 공간 전체를 무대화하여 이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극 안으로 들어온 느낌을 받는 것이다.


헤이즐은 로즈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궁금해하지만, 헤이즐의 남편 로빈이 등장하며 말이 끊긴다. 삼각관계였던 세 사람은 젊은 시절 원자력 발전소에서 함께 일하던 과학자였다. 로빈은 결국 헤이즐과 결혼했지만, 이후에도 로즈와 연인관계를 오랫동안 이어 왔다는 것이 밝혀진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잊으면 한 편의 치정극 같은 전개다. 하지만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셋이 떠드는 바로 옆에 있는 스크린에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그래픽으로 표현되며 계속해서 존재감을 알린다.


 

[돌파구] The Children(25-0929)_ⓒShin-joong Kim_094.jpg

 극단 돌파구 제공 : 사진 김신중

 

 

세 사람은 분명 은퇴한 노인이고 심지어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큰일을 겪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서 침울한 분위기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 하루종일 텔레비전 보는 은퇴자의 삶을 경멸하는 헤이즐은 샐러드를 먹고 요가를 하면서 노화에 적극적으로 맞선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외치는 로빈 역시 삶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전기가 제한되는 상황에 불만을 표하고, 남의 살을 뜯고 싶다며 스테이크를 요구하는 모습이 꽤 상징적이다.


로빈과 헤이즐은 잘 살고 있다. 문제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이라는 단어를 의식하고 연극을 보면 극중 이 단어가 여러 차례 반복되며 다양한 대상을 가리킨다는 걸 알 수 있다. 로렌을 포함한 로빈과 헤이즐의 네 아이들, 출입금지구역 안에 있는 농장의 소들, 그리고 발전소에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남아 있는 젊은 노동자들.


무대에는 없지만 세 사람의 대화로 추측하건대, 아이들은 잘 지내지 못하는 듯하다. 로렌은 서른이 넘었는데도 부모의 속을 썩이고, 소들은 피폭되었으며, 젊은 노동자들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무대 바깥에 있는 ‘아이들’은 무대 위에 있는 기성세대에 의해 한심하거나 가여운 존재, 또는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타자화된다. 그렇다면 로즈가 ‘아이들’과 달리 이렇게 잘 살고 있는 부부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진짜 목적이 드러나며 극은 절정을 향한다.

 

 

[돌파구] The Children(25-0929)_ⓒShin-joong Kim_046.jpg

극단 돌파구 제공 : 사진 김신중

 

 

한 차례 암 수술을 했던 로즈는 발전소 안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를 대신해 일할 은퇴한 노동자를 모집하러 왔다. 즉, 로즈는 헤이즐, 로빈과 함께 무대에서 ‘내려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가 대피 절차도 없이 발전소를 만들었다고 지적하며 세대니, 책임이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헤이즐에게는 로즈의 이야기가 거북할 뿐이다. 비유적 표현으로도, 문자 그대로도 이 집에 “똥을 싸러 온” 존재이다. 헤이즐과 로빈은 당연히 분노를 쏟아낸다.


작품은 로즈의 입을 빌려 이러한 로빈과 헤이즐의 삶을 섣불리 비판하기보다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젊은 시절 원자력 발전소 건립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생명까지 담보로 걸고 자기 자신을 희생할 의무가 있을까. 그런 요구를 받는 것은 정당한가. 두 사람이라고 완전히 책임감 없는 인물은 아니다. 헤이즐은 사고가 나고도 발전소를 멀리 떠나지 못한 채 일상을 이어가고, 로빈은 위험한 걸 알면서도 소들을 돌보겠다며 매일 농장에 간다. 하지만 로즈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충분히 길고 좋은 삶을 누리지 않았냐면서.


세 사람의 각각 다른 입장을 알기에 관객이 판단을 주저하는 동안, 의외로 로빈이 먼저 결정을 내린다. 발전소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며, 로빈은 자신이 돌본다던 소들이 사실 사고 직후에 모두 다 죽었고, 농장에 가는 건 소들을 묻기 위한 구덩이를 파고 위해서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가장 크게 분노하던 헤이즐 역시 마지막에는 갈등한다. 두 사람 다 실제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오두막에서 별일 없는 척하며 일상을 영위하는 것의 허무함과 무력감을. 지금껏 무대의 주인공이던 세 사람은 그렇게 서서히 퇴장할 준비를 한다.

 

 

[돌파구] The Children(25-0929)_ⓒShin-joong Kim_075.jpg

극단 돌파구 제공 : 사진 김신중

 

 

작가인 루시 커크우드는 백인 베이비부머를 염두에 두고 로즈, 로빈, 헤이즐을 만들었겠지만, <아이들>을 특정 세대에 관한 이야기로만 본다면 이 작품을 너무 좁게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은 미래를 담보 삼아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초래한 이 재난을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해야 덜 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헤이즐의 대사는 모두에게 유효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대에서 드러나지 않는 ‘아이들’은 단순히 다음 세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물과 식물을 포함해 우리가 망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존재, 그러나 무대에 올라오지는 못해 스스로 말하기 어려운 존재를 일컫는지도 모른다. 이들을 위해,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애들은 잘 지내?”라는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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