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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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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이후로 오랜만에 서울시향의 연주였다. 왜 이 공연을 보기로 했던가? 협연곡이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단순하고 분명한 이유가 또 있을까.


아마 이 곡이 없었다면, 내가 클래식 세계에 이렇게 깊이 발을 들이거나 이토록 애정을 쏟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멘바협(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넘쳐나겠지만, ‘특히나 애정하는 사람?’ 하고 물으면 자신 있게 손을 위로 슉슉! 뻗을 수 있다. (내향성은 잠시 넣어둬)


그래서 오늘만큼은 긴긴 내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보다, 그들의 손짓에 먼저 다가가보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구태여 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좋은 연주를 보여준 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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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나는 정말 뒤늦게 3층 자리 하나를 주워, 널찍한 시야를 시선 아래에 두고 그날의 공연을 관람했다. 협연곡을 제외하면 교향곡은 오히려 1층보다 훨씬 조화롭게 들렸다. 늘 멀리 있다고만 생각했던 카라멜색 천장이 한층 가까워 보여 반가웠다. 안녕?


그렇다면, 이제 무대로부터 아주 멀찍이 떨어져 있던 10월 1일의 그날을 회상해볼까?

 

 

 

신동훈, 「그의 유령 같은 고독 위에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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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애니메이션에서 딱— 주인공들이 사고 치기 10초 전의 배경음이 있지 않은가? 약간 동화 같으면서도,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운치. 스멀스멀 위험한 낌새로, 물약이나 독이 든 스프를 제조하는 연금술 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증기 같은 분위기.


그게 이 곡의 서두에 깔려 있었다. 3층이라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본 내겐 한층 비현실적인 몰입감을 주는 포인트였다. 오히려 진짜 오케스트라 공연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듣는 게 좋다는 말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왼편과 오른편, 그리고 가운데의 소리 조합이 이렇게 적절하게 배합되어 전달되는구나— 하고.


그걸 어디서 제대로 느꼈던가? 아까 증기를 표현하던 소리들이 양옆으로 가마솥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다가, 소리의 중심 공간에서 암벽의 돌들이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 절묘한 위치가 귓가에 닿았다.


무언가 내려앉은 자리의 아래쪽 지점에서 야금야금 독극물의 기운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이 기운도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다. 무슨 색일까? 아무래도 살상용이니 연두빛에 가까운 초록이겠다. 피워진 것들에 속절없이 취해 가는 사람들의 빙글거림이 절묘하게 묘사되고,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 사태가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지만, 서로를 향해 포탄을 겨누며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면으로 드러난다.


마법 피리를 부는 사람도 있다. 아까 낙하한 것들과 같은 것들이 피어오른다. 사실, 이 사태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히려 정신 차리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냥 모두 취해 있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이 어질어질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 특유의 음울한 보랏빛 기운에 주술의 그림자가 울렁이며 전면을 덮어온다. 동시에 오묘하고 위태롭게 향락적인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입꼬리의 그림자. 그 장면 안에 있으니,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가 절로 떠오른다. 아, 결국 이 장면도 누군가 사고 치고 있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이 곡의 제목이 무엇이던가. 그의 유령 같은 고독 위에서. 주제는 예이츠의 시 「1919」 중 “많은 독창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사라졌다(Many ingenious lovely things are gone)”라는 문장에서, 음악적 영감은 알반 베르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개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작곡가 신동훈은 말했다. “이 곡은 절망적인 세상에서 낭만을 노래했던 시인과 작곡가, 두 사람을 향한 러브레터입니다.” 그래, 이 곡은 어찌 보면 작곡가가 적어 내려갔지만 닿을 수 없는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절망과 열망 사이를 오가면서도 무엇 하나 포기하지 못하는 그 아이러니한 속내를 지극한 아름다움 속에서 드러내며, 그들에게 바치는 찬사일지도 모르겠다.


경건하다기엔 너무 낭만적이고, 마냥 아름답다고만 하기엔 그 깊이가 지하를 뚫는다. 풍경을 묘사하는 단순한 스케치라기엔 소리의 방향성이 분명하다.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향해 ‘닿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가 온 악장, 온 세상에 가득하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곡이 ‘고독 위에 서 있기’ 때문에 파스텔톤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예프가 다루던 특유의 현대음악적 요소들이 장난스럽지만 결코 이질적이지 않게 녹아 있다.


현악이 녹빛 증기를 놓지 않고 드리워져 있으면, 타악기가 까만빛을 바닥에 툭툭 던지고, 금관악기들이 개갈거리며 개성을 더한다. 결국 닿고자 하는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이 아니던가.


이 소릿길은 하늘이 아닌, 저 지하의 심층부를 향해 간다. 상승하는 기류가 있을 뿐, 전체적으로 보면 지극히 하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 쿵쾅거리며 거대한 병정들이 걷고 있을 뿐이지, 이 곡은 ‘러브레터’다.


매우 숫기 없는 사람이 조절 안 되는 마음을 왕창— 또 울컥— 쏟아냈을 뿐이다. 아, 편지 봉투가 미어터진다! 해준 것에 비해 마음이 너무 커서, 받는 이가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아, 마지막 폭격을 기억하시는가? 기절한 거 맞는 듯 (꽥)

 

 

 

펠릭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 Op. 64 (18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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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I. Allegro molto appassionato — 매우 열정적으로, 빠르게


절제와 서정성의 그 딱 중간지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자가 절묘한 합을 이루며 나아간다. 음표 하나하나를 명확히 짚어내기보다, 부드러운 흐름을 시작선으로부터 쭉— 이어 나가는 기분. 기억하라. 오늘의 연주자는 리본 하나를 손에 가볍게 쥔 채 끈질기게 이어지며, 당신의 시선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이 연주는 ‘분절’이 아닌 ‘이어짐’이다.


오케스트라는 분명하고 강한 정체성으로 그 리본의 사방을 감싸 안는다. 오늘의 협연자는 소리를 통해 발레 동작을 그려낸다. 보통 실크 리본이 바람에 흩날리면 나풀나풀대지 않는가. 그러다 자연스럽게 깊은 경사로 휘어지는 지점이 있지 않은가.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을 때, 김봄소리는 높은 음으로 포인트를 확실히 찍어 관객이 따라갈 지점을 분명히 제시한다.


도대체 숨을 어디서 내쉬는지 모를 만큼, 첫 음이 계속해서 이어져 저 위까지 달할 때까지 부드럽게 뻗어 나간다. 그 부드러움은 어디서 오는가. 치닫지 않고, 작곡가가 “여기까지는 소리가 닿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을 법한 지점을 딱 맞게 찍지 않는다. 그 포인트를 애워싸는 미묘한 표현들로 가득하다.


바이올린과 자신이 낸 소리를 이렇게까지 다정하게 다루는 연주자는 처음이었다. 저 아래로 소리를 내려보낼 때조차 끊김이 없다. 강렬한 색채감보다 길게 이어지는 연결성이 눈에 담긴다. 자신보다 멘델스존의 선율을, 그 미소와 함께 능숙히 전달한다.


그렇다고 음색의 선명도를 놓치는 것도 아니다. 짚어내야 할 포인트들엔 빛가루가 정확히 쏟아진다. 하지만 오늘은 축제의 장 아닌가. 기교를 앞세울 때가 아니다. 노란색 나비가 이렇게나 목청이 좋을 줄이야.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의 기세가 강한데도 서로 조화롭고, 균형을 잃지 않는다.


자잘하게 숨을 죽였다가 더 높이 날아올라 마음에 커다란 서사적 떨림을 주는 대신, 부드럽고 아스라히 관객의 앞뒤로 긴 춤을 춰준다. 그래서 듣는 이는 부담스럽지 않다. 연주자의 개성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진짜 이렇게까지 연결해낼 수 있구나. 수직적으로 튀어오르거나 내려앉으며 포인트를 주기보다, 수평선의 중심을 단단히 잡은 채 그 안에서 세밀하고 다정하게 파동친다. 그 모습이 너무 매혹적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뒤로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앞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이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충분히 너 할 일은 다하고 있어.” 은은한 향기로 그렇게 일러주는, 노란 옷을 입은 팅커벨 같다.

 

 

Ⅱ. Andante — 느리게, 노래하듯


이 시작부만 들어도 심장 깊숙이 쿵 하고 가라앉을 만큼, 나는 이 2악장에 마음이 깊다. 시선을 다 내려놓고 마음으로만 들으면, 아까의 요정이 부드러운 춤을 이어간다.


네가 꼭 무언가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한들한들 흩날려야 할까? 그냥, 선율 자체에 편안히 몸을 맡겨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물어오는 듯한 따뜻한 손길이 있다. 멘델스존을 속 편하게 음미할 수 있는 시간 자체를 만들어주는, 투명한 날갯짓이다.


클래식이란 건 네게 상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에 오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는 ‘시간의 예술’을 가장 깊게 느끼게 하는 장르임을 부드럽게 일러준다. 굳이 무언가를 얻어가려 하지 말고, 지금의 소리를 안정적으로 즐겨보라고 다독여주는 다정한 ‘언니’의 마음이 그 안에 가득하다.


여리게 요동치며, 지금 이 길이 맞다고 짚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협연자의 소리에 맞춰 저 아래에서 바람이 되어, 마지막엔 강한 세기로 웅— 하고 울려오는 단원들의 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냥 이 온난한 회오리 안에 있을 때면 내 삶의 회색빛이 잠시 잊혀간다. 굳이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분명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이대로 웃고 있으면 된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그렇게, 계속해서 다정하게 노래한다.

 

 

Ⅲ. Allegretto non troppo – Allegro molto vivace — 조금 경쾌하게, 너무 빠르지 않게 – 매우 빠르고 생기 있게


‘조금 경쾌하게’로 시작할 수 있도록, 아까보다는 살짝 아래쪽에 위치해 이제 곧 지금보다 더 높이 날아오를 것임을 부드럽게 예고하는 움직임들이 있다. 그러다 아주 가녀리고 짧게 떨리는데, 처음으로 소리가 아주 약간 나뉘며 그 자체로 포인트가 된다.


3악장이 시작되는 딱 그 순간, 바이올린이 가벼운 도입부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소리의 끝을 날리면 곧 더 생기 있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어, 처음으로 음이 하나씩 순간을 나누기 시작했다. 약간 성악에서 ‘아–아–아–아–’ 하며 끊어 호흡을 뱉는 것만 같다.


3악장은 이렇게 재미를 주는구나. 어쩜 오케스트라와의 합이 이렇게 딱딱 맞을까? 누구 하나 캐릭터가 이렇게 뚜렷한데도, 이토록 ‘조화롭다’는 단어 안에 함께 포함될 수 있는 게 놀랍다. 둘 다 숨을 죽였을 뿐, 음색의 밀도는 엄청나다.


김봄소리는 흐름을 절대 놓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도 그 기세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음표 하나하나를 살려낼 때마다 온기가 묻어난다.


3악장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꽃 한 송이가 거의 만개한 듯한 순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여긴 하나가 아니라 꽃밭이다. 노란 유채꽃밭이 관객의 세상 전체에 드리워질 즈음, 이 여정은 아름답게 끝이 난다.

 

 

 

앙코르 — 크라이슬러, 〈아름다운 로즈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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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연결과 나뉨이 절묘하고, 무대 위로 장밋빛이 은은히 섞여든다. 농밀하되 마냥 무르익지 않은 생동감이 저 현 위에 가득하다.


앞서 가지 않고, “이 음을 함께 나눠볼까요?” 하고 능숙히 관객에게 소리를 펼쳐내는 사람이 있다. 어려울 것 하나 없이, 조용한 공간 안에서 샹송을 불러주는 싱어 같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가 아이들에게 도레미송을 알려줄 때 지었던 그 따뜻한 미소를 잔뜩 머금고 있던, 기분 좋은 앙코르였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 마단조 Op. 27 (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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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I. Largo – Allegro moderato — 매우 느리게 – 보통 빠르게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 순간을 그려낼 것이다— 그렇게 관객에게 선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음악이란 건 뭔가 내가 부른다고, 외친다고, 붙잡는다고 해서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냥 원래 있던 무언가를, 그 자리에서 그만큼의 형태로 보여줄 수 있는가. 사람의 두 눈으로 형용할 수 있는 아지랑이를 그려낼 수 있는가. 모든 일은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하는 듯하다.


이 1악장만 봐도 그렇다. 방금 전까진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들이 팔을 움직이고 숨을 들이마시자 라흐마니노프가 생각하던 그 풍경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이미 사라진 자를 두고, 우리끼리 그의 세상을 이 앞에 다시 펼쳐 놓은 것이다.


라벤더빛 안갯길이 서사의 흐름을 타고 구름 위에 얹힌다. 이 순간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지브리 영화를 볼 때처럼— 거대한 형체가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거나, 주인공이 운명적인 행위를 하기 직전, 그 사이에 잠시 머무는 ‘숨의 시간’이 있지 않은가. 원령공주에서 들리는 그 자연의 장엄함 같은 소리들. 바로 그게, 보랏빛으로 물든 이 1악장의 정서다.


벚꽃 향이 감도는 차를 마셔본 적 있는가? 라벤더 맛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 있는가? 입으로는 뭔가 딱 “맛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입안과 코끝 사이로 은은히 스며드는 그 꽃내음이 있다. 이 악장은 바로 그 정도의, 부담스럽지 않은 기세로 앞으로의 길목을 그들이 알아서 거닐어 주는 장면이다.


관악과 바이올린 한 대가 깃발을 꽂고 “따라오라” 이르면, 또 다른 관악이 뒤이어 표시를 남긴다. 이 악장을 들을 때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오히려 나와 가까운 천장만 응시했다.


세상이 내 아래에 있다고 느껴본 적이 있는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층 중간에 앉아 있으니, 그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전신으로 체감했다. 커다란 돔 형태의 작은 세상이 내 발 아래에서 거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교향곡을 듣는 묘미가 뭘까. 나와 완전히 동떨어진, 작곡가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이전의 장면들을 마음껏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검투사 두 명이 싸우는 장면, 파도가 용솟음치는 순간, 사람이 세상을 손에 쥐고 있는 듯한 착각, 번개가 대지를 내리꽂는 지점까지— 몇 개의 악기만이 지휘자의 두 손 아래 놓였을 뿐인데, 몇 개의 파노라마가 스쳐 갔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클래식에서 가장 사람이 방심하게 되는 순간은 바로 그때다. 거대한 세계로 부풀어 오르다가도 어느새 작은 점이 되어, 누구라도 “좋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선율을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에 가져다 놓을 때.


어디 예고편이라도 있겠는가. 이 모든 지점을 장악하고 있는 건 지휘자와 연주자들뿐일 것이다. 그저 ‘듣는 이’인 나는 이 흐름에 안정적으로 휩쓸려 나가기만 해도 다행이다.


내 두 시선 아래에는, 아직 닿지 못한—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풍경들이 깃들어 있다. 무지개 세 개, 소용돌이 다섯 개, 바람결 열 가지다.

 

 

Ⅱ. Allegro molto — 매우 빠르게


첫 음에, 멀찍이 던져두었던 시선을 바로 아래로 내리꽂았다. 이들이 왜 ‘서울시향’인지, 제대로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이 내 앞에 쾅— 하고 놓였다. 어른들의 게임이고, 프로만이 자리할 수 있는 곳임을 어디서 느낄 수 있을까.


개별은 사라지고, 2악장과 지휘자만이 아주 제대로 된 ‘재간거림’을 아주 ‘세련되게’ 노닌다. 이 악장에서 지휘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모든 몸짓이 정박보다 정확히 1초 앞서 있었다. 그 1초가 지난 후, 그 몸짓을 따라가는 바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절제된 선상의 흐름을 그렸다. 정말, 딱, 그가 지시한 그대로였다.


손가락을 아주 잘게 떨며 한쪽 방향으로 이끌면, 정확히 그 귀청을 때리는 소리가 위에서 아래로, 시계방향으로 돌며 지휘자의 손바닥 아래에서 자잘한 춤을 추다 강풍으로 타올랐다. 중간에 총주가 경고처럼 울린다고 했나? 이건 경고가 아니라 폭격이다. 뒤이은 건 수천의 화살이며, 이어지는 빗금들에 시선이 압도된다.


아직 겪어보지 않은 것들이 저 앞에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울시향의 하늘빛이 마구 라흐마니노프의 세상을 뒤덮는다. 하지만 관객을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그저 상영한다.


라흐마니노프가, 왜 이 교향곡이 이렇게나 지금까지 전승되고 끊임없이 향유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그날의 소리로 증명해냈다. 형용 자체가 어려운 풍경이 있다. 선율이라기엔 거대하고, 그저 큰 그림이라기엔 개인에게 다가오는 마음이 너무 내밀하다. 이 복잡성을 언젠가 그려낼 수 있을까. 차라리 붓을 드는 게 더 쉬운 일일지 모르겠다.


그냥, 소리에 잡아먹히면 된다— 이럴 땐. 어차피 죽어도 이해 못할 세계관을 그려낸 라흐마니노프만의 롤러코스터 아니겠나.

 

 

Ⅲ. Adagio — 느리게, 서정적으로


나는 저 악기들이 다정할 때가 제일 싫다.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마음들이 빤히도 나를 응시한다. 왜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나? 내 예민한 속을 하나하나 들춰내 따박따박 다 받아주고, 증명해낸다. 뭐라고? 너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노래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들에 꼭 가사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기분이 들면, 그 기분을 매 순간 우리가 아는 말들로 다 묘사할 수 있는가? 정말 사소한 것들에 흩날리고, 거대한 것에는 오히려 무덤덤해지는 때가 있지 않은가.


열심히 했는데도 가질 수 없는 게 있고, 그저 아무렇게나 했는데도 우연히 찾아오는 기회들이 있다. 사랑받고 싶어 마음을 다했는데도 얻지 못하는 시선이 있고, 외면하였어도 찾아오는 열망이 있다. 그 모든 아이러니를 감싸안는 소리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이 세상보다 훨씬 더 모래알 같은 존재임을 체감한다. 그래서 기쁘게 작아질 수 있다. 어깨와 가슴팍을 넓게 펴지 않아도 된다. 웅크려 있으면 그 자체로 감싸안아주는 게 이 악장이다. 그리 해주기 위해, 그들이 오늘을 노래하고 있다.


매순간 내일을 향해 고조되어야 하는 일상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넓게 이해시켜주기 위해 저만큼 모여들었다. 이만큼이나 집중하고 있으니, 마음을 더 내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예민한 것들이 이리 모여, 예민한 것들을 안아준다.


이곳에서는 무너지는 자가 이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마음을 더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승자다.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때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으며, 제 손에 쥐어진 것을 던져버릴 수 있는 이가 오늘을 담아간다. 

 

기꺼이 위로받고, 타인의 눈물에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 

 

살아가며 우리는 거대한 뒷배가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지 않는가. 이 3악장은 금세 지나갈지언정, 머무는 그 순간만큼은 커다란 산이 되어 내 앞과 뒤를 든든히 지킨다.


그 기운을, 당신이 꼭 느껴봤으면 좋겠다.

 

 

Ⅳ. Allegro vivace — 빠르고 생기 있게


진짜 이 클래식의 형식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직 울고 있는데, 티슈도 안 주고 꼭 이렇게 신나 있더라? 새드엔딩 영화를 막 봤는데, 얼결에 에버랜드 퍼레이드 행렬에 끼어든 기분이다. 아, 참. 그 와중에 또 합은 좋아서 듣긴 해야겠고. (나원참)


아까 2악장보다는 훨씬 사람 냄새 나는 악장이다. 방금 전까지 거대한 대서사시를 향한 인류의 발걸음이었다면, 이제는 아름다운 이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신나는 뜀박질이다. 아주 조금 더 나긋하기도 하다.


나는 저 현악이 아래에 있다가 불쑥 튀어 올라 예뻐지는 소리들이 정말 싫다! 너 때문에 내가 이러고 글을 쓰고 있는 거 아니냐고. 틈새로 아름다워지니, 순간 단위로 너희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큼 고아하게 피어났는데, 붙잡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나온 악장들이 워낙 감정적으로 강한 파도 같기도,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지 않았던가. 참 깊게도 달래준다. 반복적인 것들이 저 멀찍이 갔다가 슬슬— 재미난 방향성 아래에서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 풍경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을까?


서정적인 바람이 진짜— 따뜻하고 시원하다. 따뜻하고 시원하다니, 뭔 소리냐고? 클래식은 원래 그래요. 담아진 마음은 온풍이고, 선율은 초강풍이다. 그걸 담아낸 지휘자의 역량에 기함했고, 곡이 끝나자 지휘대에 몸을 살짝 기댄 모습을 보며 얼마나 몰입했는지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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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그날의 연주자들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혹은 얼마나 감동적인 연주를 펼쳐냈는지는 어디서 드러날까? 공연이 끝나고 로비를 빠져나가며 생겨나는 인파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계단만 내려가봐도 알 수 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웃음꽃이 곳곳에 피어난다.


기분 좋은 기운이 예당을 가득 채우니, 혼자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도 외롭지 않다. 서울시향이 그려낸 그날의 라흐마니노프가 아직도 마음에 선연하다. 그들이야 당연히 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글쎄— 10월 1일의 관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 신동훈 작곡가의 첫 곡 제목을 빌려, 이 날의 후기를 살짝 담아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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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그의 유령 같은 고독 위에서,

그의 대양 같은 위로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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