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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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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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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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세 자매>에서 브론테를 만나고 다시 세 명의 브론테를 다룬 연극 <언더독: The other other Bronte>를 고른 건 여전히 세 자매와 제목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확실히 말하자면 뮤지컬 <브론테>가 순한 영계백숙이었다면, 연극 <언더독>은 알싸하게 매콤한 찜닭이다.


이야기의 줄기는 다르지 않다. 브론테 가의 세 자매는 역시나 글을 쓰기 위해 남자인 척 가명으로 책을 낸다. 처음에 세 명이 모아서 낸 책은 단 두 권이 팔렸지만, 각자의 가명으로 앞에 나섰을 때는 더 많은 책을 팔고, 많은 사람들의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괴로워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조금 더 건강했다면 아마 숨이 다하는 날까지 글만 썼을 사람들이다. 그렇다. 예술은 배고픈 것이고, 때로는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최근 들어 종종 떠오르는 생각인데, 예술이 밥을 먹여준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예술이 긴 세월을 살아남은 것은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누군가와, 그들의 표현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누군가가 서로 위로받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봐주지 않는 예술은 외롭고, 예술가 동떨어져 사는 삶은 고단할 때도 있으니까. 인생이 허락한 진통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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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기에 첨가된 매운맛은 작가로서의 욕망이다. 주류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오래도록 기록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 그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머리로 하는데, 이 자매들은 끝까지 간다. 첫째가 잘 될수록 집안이 평안한 곳이 많다곤 하지만, 샬롯은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 성격이다. 그녀는 다시 볼수록 야망에 가득한 작가다. 스스로 필력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고, 둘째인 에밀리의 필력도 인정하지만, '뽀얀 새앙쥐' 같은 앤은 인정할 수 없다. 경제적인 문제를 위해서 작가를 포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녀는 유독 앤에게 박했다.

 

앤이 낸 좋은 아이디어는 모두 자기가 낸 것인 것처럼 둔갑시켜 버렸다. 남자 이름의 가명에 숨어서 다 같이 글을 쓰자고 한 생각도 자신이 한 것처럼 납득해 버린다. 그녀의 대표작인 제인 에어의 모델이 귀여운 새앙쥐 같은 가정교사 앤이었다. 심지어 그건 동생의 작품인 <아그네스 그레이>가 출판이 확정되고 나서 출판되기 전에 더 큰 출판사와 출판을 더 빨리해 버린 거였다. 가정교사 이야기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마침 가정교사를 소재로 비슷한 이야기를 완성해 버렸다면?

 

그리고 앤을 버려두었다. 가명 뒤에서 글을 쓰기로 해놓고, 결국은 런던에 앤과 함께 갔다. 내가 바로 그 유명한 <제인 에어>의 작가라는 걸 알리고, 잘 나가는 문인들을 만나고 싶어서 앤은 내버려 뒀다. 정신없이 즐거워하다가 뒤에서 자신에 대한 조롱을 듣고 나서야 앤을 찾았다. 앤은 그래도 오니까. 아무리 상처를 주고 함부로 대해도, 그녀의 말을 들으니까. 앤이 건강이 악화되어 죽어가는 과정조차도 샬롯은 자신의 글에 자기 입맛대로 모델을 삼아 썼다. 심지어는 먼저 세상을 떠난 두 동생의 작품에도 약간씩 수정도 했다. 동생들이 그걸 무척이나 싫어했을 텐데도. 막내 앤의 소설은 인기가 많아서 추가 인쇄를 하려고 하니 막았다. 그녀는 부정할 수 없는 나르시시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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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을 잠시 잃었다. 가족끼리 그럴 수 있나? 생각을 하다가 안될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다른 브론테들이 무방비했다고 해야 하는 걸까? 그들의 가명인 벨 형제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다고 치자. 이들이 막대한 재산을 가졌고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서로에게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하자. 아니면 어느 왕실로 가자. 어떤 왕에게 세 명의 왕자가 있었고, 왕위를 이를 세자를 찾기 위해 경쟁하고 음해하려고 했다면 그건 이상한가? <오징어 게임>만 봐도, 최후의 우승자 후보군은 남자였다. 그들을 서로를 죽이고 우승상금을 타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런 상황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생각보다 이상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 형제였다면, 그것도 능력 상 우위에 있는 첫째가 그랬다고 우리는 그를 비난했을까? 결국은 이 게임의 승자가 된 건 확실하니까. 축하해, 네가 다른 브론테들을 이겼어 샬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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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이 실제로는 그런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다. 연극의 막바지에는 그녀의 전기를 쓴 엘리자베스 개스켈이 샬롯을 또한 자기 입맛대로 재단한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을 받게 된다. 사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모든 책에는 작가의 해석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람을 그릴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고 답할 때 우리도 역시 우리의 해석을 담아서 표현하니까.


샬롯이 앞선 뒤통수를 모두 했다는 전제하에 조금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동생을 잡도리하듯이, 세상을 잡도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드럽고 치사해도 성공하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유학길에 떠나선 유부남이지만 자신의 작품을 사랑해 준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제인 에어의 작가를 필력 좋은 오크라고 부르는' 편집자의 뒷말을 듣고도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자주 긁히면서도, 엄한 데 화풀이를 한 셈이다. 차라리 모두에게 비슷하게 했으면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할 텐데, 선택적으로 그랬단 건 그녀가 누가 약자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반증일 뿐이다.


샬롯의 언더독은 앤이었다. 그녀는 세상이 나를 여자인 작가라고 무시한다며 스스로를 약자의 위치에 두었지만, 약자들 사이에서도 더 아래에 있는 약자는 있는 법이다. 언더독끼리도 적이 있으니까. 한편으론 이렇게 활자가 넘치고, 스스로 출판을 하고 홍보를 해서 책을 판매할 수 있는 시대에, 얼마나 이들은 전쟁 같은 삶을 보냈나 안타깝기도 했다. 물론 그랬다 하더라도, 주류 중에 주류가 되고 싶었다면 상황이 엄청 다르진 않았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샬롯이 그녀만의 전쟁을 치른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예술은 특히나 절망스러운 존재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너무 어렵지 않게, 너무 잘 하는 존재가 나타난다. 브론테가의 후계자를 고르는 문제라면, 샬롯이 가져간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브론테가 되는 것이 정말 그녀가 원했던 것인가? 그녀가 글을 쓸 때마다 절망스럽게 하는 작가는 없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런 엄청난 재능을 앞에 두면 그녀는 무너졌을까, 다시 무너뜨리기 위해 땅을 딛고 일어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을까?


앤은 샬롯이 말하는 새앙쥐가 아니었다. 문학적인 필력에 대한 평은 갈렸을지 몰라도 아이디어가 좋았다. 그녀에게 약간 부족한 게 있었다면 기세일 것이다. 샬롯 언니의 기억이 왜곡되어서 "네 꿈은 가정교사 아니었나? 설마 작가가 되려고? 출판사에 보내려고?" 할 때도 "왜 안돼?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지, 언니들만 작가가 되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라고 말할 수 있는 패기 같은 건 없었으니까. 그녀의 마인드는 다큐멘터리 감독과 비슷하다. 현실을 보여주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샬롯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었더라면, 아마 앤의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나면 샬롯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다. '살롯..!' 그런 걸 보면 주인공이 맞는데, 연극이 끝난 후 승자는 다른 브론테들이다. <제인 에어>는 이미 알고 있고, <폭풍의 언덕>은 다시 읽어보고 싶어 졌고, 아그네스 그레이와 와일드펠 저택의 여인은 이미 사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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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교훈이 있다면, 세 자매와 그들의 남동생 브란웰에게 하나씩 받아보자. 브란웰을 생각하면 술을 적당히 마셔야 한다. 세 자매를 포함한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은 그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다. 샬롯처럼 살면 스트레스가 없다. 역시 정신건강에는 좋은 건 내 덕, 나쁜 건 남 탓을 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세 자매 중 가장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장수도 했다. 에밀리처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내가 만족한다면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완성하면 된다. 놀랍게도 그것이 한참 뒤에 인정을 받기도 한다. 물론 그마저도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앤에게서는 우직하게 진실을 대하는 법을 배운다. 진실은 아주 깊고 차가운 우물 아래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시라, 잔인한 영화나 드라마에도 사람들이 많이 익숙해졌으니까. 200년 사이에 너무 사실적이라 잔인한 소설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독자들이 되었다.


 

"이 소설은 그저 독자를 즐겁게 할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을 만족시키거나, 언론이나 대중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나는 진실을 밝히고 싶어서 이 소설을 썼다. (중략)

 

그렇지만 나는 악행이나 악인은 미화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 입장에서는 나쁜 것을 실제보다 덜 추악하게 묘사하는 게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정직하고 안전한 길인가? 젊고 철없는 독자들에게 인생의 덫이나 함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꽃과 나뭇가지로 숨기는데 좋을까? 아, 독자여! 그처럼 교묘히 현실을 숨기거나,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 괜찮다" 하고 속삭이는 일이 줄어들면, 젊은 남녀들이 죄를 짓고 비참한 지경에 빠지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이 쓰라린 일을 겪고 나서야 경험으로 삶의 교훈을 얻도록 방치하고 있다.


- 와일드펠 저택의 여인, 제2판 작가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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