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1756075342464.jpg

 

 

바삐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계속 무언가를 놓친 기분이 들었다. 그건 필시 나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신호였고, 조금은 깊은 내면의 나를 하루빨리 만나고 싶었다.


<단테 신곡>은 그렇게 보게 된 연극이었다. 원작이 워낙 유명하기도 하거니와, 극단 피악의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이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 주제 선정 작품이라는 문구에 큰 기대를 하며 세종문화회관을 찾았고, 작은 극장에서 만난 <단테 신곡>은 기대했던 대로 삶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전해주었다.


 

 

<단테 신곡>, 극단 피악만의 언어



단테신곡03.jpg

 

 

<단테 신곡>은 단테가 지옥의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를 만나 지옥, 연옥, 천국의 세계를 순차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특히 본 극은 ‘지옥’의 분량이 가장 많았고, 각 지옥의 모습과 그 속에서 벌을 받는 자들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며 인간의 존재 의의와 삶에 대한 통찰을 끌어낸다.

 

1막에서 베르길리우스 역할의 정동환 배우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그 아우라와 존재감에 압도되고 말았다. 첫 대사를 위해 입을 떼는 순간, 목소리와 발음, 표정과 손짓에서 55년간의 내공이 그대로 드러났다. 겹겹이 쌓인 세월에서 드러나는 무게감과 그 속에 엿보이는 다정함이 어우러진 정동환 배우의 베르길리우스는 무척 인상적이었고 흡인력 있었다.


극단 피악만의 연극 언어도 신선했다. 1막 초반부에서 괴로움에 사로잡혀있던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만나 지옥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은 무대 위가 아닌 스크린과 영상으로 연출된다. 실제 건물이 빽빽한 도심 속에서 두 인물이 지옥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해당 영상은, 마치 연극과 영화를 섞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외에도 LED 소품과 철재 구조물 등을 활용하여 마치 현대 예술에 가까운 연출을 보였다.



단테신곡09.jpg

 

 

1막 중반부터는 무대 위 여러명의 배우가 본격적인 지옥의 여러 층을 묘사한다.

 

각 층은 탐욕, 나태, 분노, 시기, 교만 등 기독교의 7대 죄악에 기반한 죄목이 부여되고, 현세에서 해당 죄를 저지른 자들이 벌을 받는다. 각 지옥에서 벌을 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얇은 옷만 걸친 채 온몸을 사용해 춤을 추는 젊은 단원들의 몸짓과, 긴장감 넘치는 일렉 기타 소리가 매력적인 배경음악으로 표현된다. 괴로운 표정으로 몸을 움직이며 점점 땀에 젖어가는 배우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지옥의 괴로움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떠오르고, 그 고통과 괴로움을 연기한 모든 배우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이후 2막 후반, 단테는 연옥과 천국에 이른다. 연옥에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작별 후, 성녀 베아트리체를 조우한다. 단테는 천상의 세계에서 아홉 가지 영역을 거치며, 극은 ‘사랑’의 보편적 힘과 정화에 대한 통찰로 마무리된다.


지옥을 단순히 죄와 벌의 세계로만 해석하지 않고, 지옥,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른 단테의 여정을 결국 관객에게 정화와 사랑으로 나아가는 힘으로 해석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런 점에서 지옥만큼이나 극단 피악만의 연옥과 천국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죄를 직시한다는 것


 

무대 위의 지옥에서 그들이 진실로 고통을 느끼는 모습 자체가 다른 어떤 연출보다도 직접적이었고, 자연스럽게 개인의 죄를 돌아보게 했다. 그것을 보며 21세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무교인이 했던 생각은,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악들을 너무도 착실히 하나씩 적립하며 살아서, 내 지옥 생활은 각 층을 돌며 벌을 받느라 무척이나 바쁘겠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종교적 세계관보다는 성찰과 정화라는 개념에 집중하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의 특성상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와 그에 대한 두려움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극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내 안에는 전혀 다른 걱정이 자라나고 있었다.

 

 

단테신곡08.jpg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진정으로 솔직하게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사후세계가 걱정되지는 않았으나, 내가 나의 죄를 진정으로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스러웠다. 이는 결국 종교와도 맞닿을 수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종교를 가지고 신을 믿는 자 중에서도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 못한 자가 수두룩한데(그들은 이미 무대 위에서 고통스러운 벌을 받고 있었다), 나는 종교도 신도 믿지 않는다! 그들도 그러한데 나는 얼마나 나의 죄를 돌아보지 못할까 싶다. 나는 무엇을 통해 나의 죄를 있는 그대로 돌아볼 수 있는가?


애초에 이것을 왜 걱정하는 것일까. 내 죄를 분명히 직시하는 것이 내게 왜 중요할까. 근래 했던 심리검사 결과지에서 꽤 높은 수치로 찍혔던 ‘이타심’ 때문일까? 그러니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인간이 아닌 도움을 주는 인간으로 비치길 바라서일까? 혹은 그저 불확실한 것이 불편해서일까? 알 수 없다.


이어서 나는 내가 사랑과 행복을 진실하게 이해하고, 실제로 그것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상당히 미심쩍어하는 중이다. 나는 정말로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실제로 그것을 느껴본 적이 있으며, 진정으로 그 힘을 믿는가? 정말 사랑으로 모든 것이 정화될 수 있다고 믿는가? 어쩌면 청소년기에 끝냈어야 할, 그래서 이 나이쯤이면 분명하게 정의하고 해결되었어야 하는 것들을, 나태한 나는 이제야 꾸역꾸역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도 확실해지지 못한 생각을 흘려보내며, 역시 나의 지옥행은 피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나가며



 

이번 연극을 준비하면서 느낀 것은 정치·권력 등 인간 사회에서 반복되는 갈등이 결국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진다는 점이다. (중략) 단테의 <신곡>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고전 중 하나이지만 정작 가장 많이 읽히지 않는 책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작품을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 관객과 직접 만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투데이신문,

「[TN 인터뷰] ‘단테 신곡’으로 돌아온 55년 차 배우 정동환 “연극, 영원히 죽지 않을 종교”」, 2025. 9. 29.

 

 

누구나 한번은 들어본 이야기, 그러나 원작을 읽은 이는 드물고 정확한 내용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더더욱 드문 단테의 신곡. 그런 고전 작품에 극단 피악만의 색깔을 덧입혀 신선함을 확보하는 일은 꽤 까다로운 일이다. 그러나 본 <단테 신곡>은 그 두 지점을 균형 있게 가져가면서, 관객에게 삶에 대한 의미와 통찰을 충분히 제시해 주었다.


정동환 배우의 말처럼, 인간 사회의 갈등과 고통은 시대와 관계없이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단테 신곡>을 연극으로 만나는 일은, 삶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보다 생동감 있게 이어갈 수 있었다. 나와 같이 아직 삶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이들에게 본 작품을 추천한다.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 김효주.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