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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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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 10일간의 역대급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졸업과 취업 사이 애매한 상태에서 사회로 나가길 유예 중인 나에게 달력 위에 빨갛게 칠해진 숫자들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만 한글 문서를 열어 글을 쓰려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생이나 직장인처럼 명확한 지위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처럼 긴 휴일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겠다.

 

얼마 전까지 나에게도 명절은 쳇바퀴처럼 반복해온 일상을 벗어나 오랜만에 부모님 댁을 찾고, 오랜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몇 십 년 몸을 담아온 집은 언제나 내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나를 편안하게 감싸주었다. 그곳에서 쉬고 돌아오면 마치 체력을 회복하는 물약을 마신 듯 일상으로 복귀할 힘이 생기고는 했다.


요즈음 명절 풍경은 조금 다르다. 해외로 멀리 떠나거나 어디 가지 않고 원래 지내던 집에서 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명절 수당을 챙기기 위해 일터에 머무르기도 한다. 하지만 치열한 KTX 예매창을 생각하면 대부분 저마다의 태생적 뿌리를 따라 고향으로 가 시간을 보낼 것이라 짐작된다.


현대 사회에 특히나 대한민국에서는 인터넷이 안되는 곳이 없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영상 플랫폼을 들락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세상의 흐름에 맞는 휴식법이겠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고는 평소보다 긴 스크린 타임뿐인 휴일은 참으로 지루하다.


그러니 조금은 쉽지 않더라도 나름 ‘텍스트 힙’이라는 새로운 트렌드에 걸맞는 휴식법을 권해보고 싶다. 바로 독서다(특히 종이책). 독서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행위다. 정해진 속도에 따르지 않고 나만의 호흡대로 시간을 조절하며, 현실의 감각에서 멀어져 누구도 모르는 새로운 세상에 존재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청소년 필독도서'라든지 '올해의 베스트셀러'와 같은 진부한 리스트에서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도 있지만 독서는 지적인 의무감에서 비롯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즐거움이 우선이어야 한다.


아래는 긴 연휴 동안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추천 책이다. 한국 현대문학 작품들을 골랐다. 읽기 쉽고, 길지 않으며, 무엇보다 재미있다.

 

 


1) 구병모 ‘아가미’


 

최근 구병모 작가의 신작(‘절창’)이 나왔다. 재밌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도서관에서 인기 작가의 신작을 구하기 위해서는 예약 목록에 이름을 오래 올려두어야 한다. 연휴에 책 한 번 읽어볼까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면 밥 한 끼 값의 새 책을 사거나 신간 대출을 몇 달간 기다리는 일은 조금 벅찰 수 있다. 그래서 (구병모 작가의 책은 모두 추천하지만) 신간을 제외하고 그중 하나를 골라봤다.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은 인물들이 모두 입체적이고 플롯 구성이 드라마틱하다. 읽는 동안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카타르시스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그의 문장은 담백하지만 힘이 있다. 인물들의 심리를 절제하면서도 독자가 거리를 두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수준으로 묘사한다. 공간이나 장면 묘사는 구체적이여서 추상적인 장면을 영상화하기 좋지만 잔인한 장면도 다소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그런 장면조차도 어딘가 잔혹동화 같은 매력이 있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소설은 완전한 화해나 행복보다 불완전한 감정 속에서 인간과 인간이 주고받는 끈끈한 점액질과 같은 감정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서툰 행동이 우리와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2)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한국 문단 내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가 점점 옅어지고 있다. 그중 대중적인 SF 작가로 정세랑이 있다. 정유미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 드라마 원작 ‘보건교사 안은영’이 대표작이지만 나는 그보다도 ‘지구에서 한아뿐’을 추천하고 싶다.


 

“널.”

그러나 한아는 마땅한 동사나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너야.”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자연스레 전이된 마음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틀렸어. 이건 아주 온전하고 새롭고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너야.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채 말하지 못했고 물론 경민은 그럼에도 모두 알아들었다.

 

 

초현실적인 설정이 어딘가 현실과 첨예하게 맞닿아 있음을 생각하면 초현실적인 미래가 얼마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고 우리 곁 어딘가에 정말로 외계인이 섞여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얼마 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노을을 보고 “예쁘다”고 감탄했을 때, 아들은 “곧 이런 풍경도 못 볼 거예요. 지구가 곧 망할 테니까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필요한 사랑은 좀더 범세계적인 차원의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 동물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나는 ‘넓은 차원의 사랑 이야기’는 연휴에 읽기 제격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민이 웃었다. 그토록 젊은 웃음. 들키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한아도 웃고 말았다. 웃음과 함께 호흡이 흐트러졌다. 더이상은 버티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한아는 장난스러운 눈을 한 경민을 마지막으로 보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마지막 걸음을 할 때, 경민이 속삭였다.

다시, 다시, 다시 태어나줘.

 



3) 김애란 ‘이중 하나는 거짓말’


 

 

채운은 점점 손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동시에 머릿속에 '피, 침, 가족, 땀' 같은 단어가 어지럽게 맴돌았다. 축축하고 이상하고 끈적이는 무엇, 모두 '친족'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생명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불쾌한 기운을 풍기는 무엇.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다. 가족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가장 원초적이고도 모순적인 관계다. 명절이 되면 평소에는 일상에 묻혀 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시 부대끼며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서 가족은 과거에 비해 광범위한 단위의 개념으로 변해가는 중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피, 침, 땀’을 직접적으로 나눈 사람들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가족애'라는 형태의 사랑을 접착제처럼 사이사이 발라둔다.


모성애나 부성애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떼어놓고 가족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단위로 설명할 수 없는 답이 맴돈다. 가족이란 보통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이다. 나를 기쁘게도 하고 힘들게도 하지만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 일상 속에서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가고 있음을 헛되지 않게 만들어주는 사람들.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내가 추천한 책이 아니더라도 좋다. 이번 명절 연휴에는 책 한 권과 함께 특별한 여행을 떠나길 바란다. 다들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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