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
시창작 수업에서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다. 그 말은 위로 같았지만, 동시에 의문을 품게 했다. 매주 한 편의 시를 써 제출할 때마다 나는 ‘모두’의 예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성실해야 했다. 단순히 단어를 조합하는 것을 넘어 끈질긴 사유와 시선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사물과 타자에게 자기 시간을 할애하고, 나의 주의를 기꺼이 그들에게 내어주어야 비로소 시가 완성된다.
시인이란 세상과 사람에게 관심과 애정을 기꺼이 쏟는 사람이다. 안희연 시인의 『단어의 집』을 읽으며, 막연한 성실함의 구체적인 얼굴을 본 듯하다. 김영하 작가는 ‘작가란 사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안희연 시인은 단순히 이름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그가 발견한 단어들의 ‘모음집’이 아니다. 안희연 시인은 때때로 단어의 이름을 묻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단순히 사물을 지칭하는 기능적인 이름이 아니라 그 너비와 깊이를 다시 가늠해 준다.
삽수, 시인의 시선
작가가 어느 날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식테크(식물을 통한 재테크)에 대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희귀한 잎은 적게는 50만 원에서 70만 원을 웃돈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엽록소 결핍으로 희귀한 무늬가 생긴 건데 이런 건 70만 원까지도 팔려요.” 그러니까 ‘70만 원’ 쪽이 아니라 엽록소의 ‘결핍’에 방점이 찍힌다는 얘기다. 결핍. 그리고 무엇보다 결핍이 만든 무늬라는 말.
p.36, 삽수
누군가는 이 사연을 듣고 식테크로 70만 원을 버는 상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숫자를 세는 대신 결핍의 결을 바라보고 그것을 해석하는 수고를 들인다. 다른 이들에게는 결핍이 ‘희소성’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시인에게는 ‘가치’, 더 나아가 ‘정체성’이 된다. 시인의 열정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휘도의 방식으로 바라보기
빛에는 대비되는 두 단위가 있다. 조도와 휘도다.

조도는 특정 면적에 직접 도달한 빛의 양을 의미하는 반면, 휘도는 그렇게 도달한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에 실제 들어오는 양을 측정한 개념이다.
그의 수상 소감에는 놀라운 지점이 있었다. 그는 “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비올라에게 있어 위대한 날이에요”라고 말했는데 두 표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 (중략) 그는 영광의 주체를 자기 자신이 아닌 비올라에게로 돌렸다.
p.60, 휘도
비올라 연주자 리처드 용재 오닐의 그래미 어워드 수상 소감의 일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의 소감이 마치 이렇게 들린다.
‘나는 비올라를 연주하는 사람이지만, 비올라를 만든 사람도, 목재를 키운 사람도, 현을 뽑은 사람도 아닙니다. 제 연주는 누군가가 경청해 줌으로써 또한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는 휘도의 방식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굴절되지 않고는 눈으로 들어올 수 없는 필연성을 이해하고 있으며, 작가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내력벽, 동병상련의 공식
안희연 시인은 학창 시절 친해진 친구들과 자신의 공통점이 ‘아버지가 없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종종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단어가 어떠한 이유로 생겨났는지 납득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살다 보면 ‘저’ 사람은 왜 ‘저’런 일로 힘든 티를 내냐며 다소 무례한 생각을 하는 한편, 왜 ‘이’게 중하고, 힘든 일인 걸 알아주지 않는지 억울해하는 모순의 연속이다.
‘저’와 ‘이’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결국 저 사람의 입장이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이는 단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넘어 ‘같은 병(同病)’이 필요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없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슬픈 일이, 병이 도리어 관계를 끈끈하게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우리가 친구가 되고, 이토록 서로에게 스민 것은 부재의 기억을 관계의 핵심에 두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p.99, 내력벽
병이란, 고난이란 그 자체로 사람을 성장하게도 하지만, 외롭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