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을 봤다.
캬라멜 팝콘과 맥주가 함께한 2시간 18분, 끝내주는 토요일 밤이었다. 술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콜라와 사이다라는 대안들이 있었음에도 난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25년을 바친 제지공장에서 만수를 내칠 때도, 만수가 고시조를 죽일 때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태양에 25년을 바친 만수는 내쳐진 후 계속해서 그늘로 간다. 장어를 받고, 해고를 당하고, 가장으로서의 압박감에 휩싸인다. 일상은 완전히 바뀐다. 넷플릭스마저 볼 수 없게 된 상황 속에서, 만수는 마트 박스 대신 권총을 집어든다. 제거 대상이 된 세 명은 만수의 페르소나이다. 종이를 만지는 기술자라는 자부심을 버릴 수 없는 구범모. 딸을 위해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하는 고시조. 바베큐와 위스키를 좋아하는 최선출.
만수는 그들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구범모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를 귀 아프게 틀어놓고 장갑 서너개를 벗기고나서야 드디어 겨눈 총은. 자막으로 전개되는 대화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변모한다. 그들의 대화는 20년 지기 친구의 술자리에서 들릴 법한 것이었고, 아라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곧 위로의 포옹이라도 할 기세였다.
최선출과의 술자리에서는 폭탄주를 들이킨다. 어쩔 수가 없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합리화하는 만수의 죄의식은 유리잔 속의 샷잔이 달그락 소리를 내자마자 끝난다. 썩어빠진 치아를 빼내고 거듭난 만수는 알코올로 입안을 헹구고, 최선출의 입을 틀어막아 땅에 묻는다.
지독하게 그를 괴롭히던 치통은 온데간데 없고 남은 알싸한 알코올 향은 그를 마비시킨다.
어쩔 수 없다는 명분에 모가지가 잘린 나무는, 또 다시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다른 나무의 모가지를 자른다. 거름을 먹고 자라나는 나무. 나무를 도끼질을 하여 탄생되는 종이. 종이는 또 다시 지폐가 사람들의 모가지를 도끼질 한다. 잔인한 순환. 어쩔 수 없다고들 하지만, 만수는 나무 가지를 꺾고 구부려서 인위적으로 모양을 낸다. 고시조를 치밀하게 분재하여 땅에 묻는다. 그리고 그 위에 사과나무를 심는다.
리원이의 첼로 연주가 울려퍼지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그래.. 어쩔 수가 없다" 라고 생각 했던 나를 되돌아본다. 리원이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미리, 서늘하게 시끄러운 공장 기계음에 귀를 막는 만수. 전기톱에 베이는 나무들. 비명 없는 고통이 오래도록 잔인하게 귀를 때린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일까?
사실은 어쩔 수 있다. 어쩔 수 없는건 없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사람마다 어쩔 수 있는 능력치가 다르고. 각자에겐 목숨과도 같은 것들이 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빼앗아버리기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기도 하다. 나는 만수를 벼랑 끝으로 내몬 사회에 화살을 돌렸다가. 그곳을 벼랑 끝이라고 생각한 만수의 거만함 대해 화살을 돌렸다가. 단지 배부른 소리라고 치부해버리는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가를 반복한다.
헷갈린다. 하지만 확실한건 만수는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잃었다. 따스한 온실, 가족들의 신뢰, 떳떳함과 도덕성 같은 것들을 말이다. 시원이는 전기톱 소리에 잠을 설치고, 미리는 불편한 진실을 덮어둬야하고, 리원이는 강아지들에게만 첼로 연주를 들려준다.
만수의 목숨은 미리도, 시원이도, 리원이도, 종이도 아닌 집이었다. 그러나 사과나무가 심어진 집이 여전히 집이 되어줄 수 있을까. 만수가 정말로 지켜야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지켜야할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