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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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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의 삶의 기준이 내가 아닌 타인일 때 평생 채워지지 않을, 밑 빠진 항아리를 붙든 채 살아가는 기분이 든다. 아무리 열심히 항아리에 물을 채워 넣어도 결국 물은 아래로 새기 마련이다. 온몸으로 항아리를 막는다고 한들 물을 얻기 위해 일어서는 순간, 항아리는 곧바로 텅 비어 있는 속을 드러낸다. 평생 충족될 수 없는 그 기준치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고 끼워 맞추며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이러한 ‘나’와 ‘타인’의 관계성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청소년 자녀와 부모로 치환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성적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빈번한 한국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청소년이 각자 저마다의 밑 빠진 항아리를 품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적 증명 시스템은 내신 등급, 시험 점수 등으로 쉽게 수치화되어 목표치 달성 여부를 판가름하기 쉽고 그렇기에 더욱 폭력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숨만 쉬면 돼.”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의 헨리는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자신에게 한 말을 종종 읊조린다. 헨리는 자신이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싶은 아버지 사무엘에게 그저 골칫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성공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헨리는 오랜 시간을 홀로 다락방에서 가상의 이야기를 꾸며내며 흘려보낸다. 헨리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버려진 투구’는 끝내 주인공인 기사, 즉 현실 속 헨리를 구하며 진정한 조력자이자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처럼 헨리는 현실과 조금은 동떨어진 세계 속에서 몇 번씩이나 자신을 구원하고, 둘도 없는 친구도 사귀며 외로움을 견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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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했다. 헨리가 의도적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필체를 흉내 내어 글을 쓰게 된 것이 그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이 내용은 ‘셰익스피어 위작 사건’이라는 실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일을 저지른 헨리의 목적은 뚜렷하고도 단순했다. 바로 사무엘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마음, 단지 그뿐이었다. 헨리는 아버지에게 어떤 미지의 신사 H로부터 셰익스피어의 미공개 유물을 전달받았다며 둘러댔고 사무엘은 드디어 자신도 대중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품게 된다. 여기서 헨리가 묘사하는 미지의 신사 H의 내외적 모습은 전부 현재 헨리와 대척점에 있는 것들로, 헨리가 바라는 이상인 동시에 환상이기도 하다.

 

헨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행복해하는 표정을 본 순간, 자신의 거짓말이 진실이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헨리의 거짓말에는 아버지를 실망시키기는 아들이 아닌, ‘조금은 쓸모 있는 아들’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의도는 거짓말이라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는 어려우나 관객은 적어도 헨리를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 H는 그런 윌리엄 헨리의 곁에서 늘 함께한다. 그는 상상 속 세상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H는 ‘신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젠틀한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때때로 이야기 속 ‘투구’처럼 곁에서 헨리를 지킨다.


 

 

밤처럼 가만히 늙어간다는 건 생각보다 두려운 것


 

어느 순간부터 헨리는 미지의 신사 H가 거짓이라 말하며 그를 부정한다. H를 부정하면서 헨리는 비로소 자신이 벌여놓은 것들이 어딘가 잘못됐음을 직감한다. 어린아이의 사소한 거짓말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그를 옥죄어 온다. 헨리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준 H를 부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헨리는 H와 함께했던 시간, 즉 사무엘이 자신을 아들로서 바라봐주었던 그때를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 칭한다. 아마 헨리는 H를 밀어내려고 할 때마다 그가 처음 가져다준 셰익스피어의 유작을 보며 기뻐하는 사무엘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무엘이 자신에게 한 번 더 크게 실망할 거라는 불안이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을 거라 추측한다. 결국 헨리가 모든 셰익스피어의 유작은 자신이 지어낸 거짓이라는 걸 밝히는 순간, 그는 비로소 미지의 신사 H를 깨뜨리고 현실을 직면하며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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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무엘은 처음부터 헨리가 가져온 작품들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진짜 유작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H는 헨리와 사무엘, 두 사람에게 '없지만 존재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H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셰익스피어의 유작이라 믿었던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극 후반부에 다다랐을 때 허상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대신 대중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사무엘과 또다시 자신에게 실망한 누군가를 자책하는 헨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헨리와 사무엘은 닮은 구석이 너무도 많다. 사무엘은 작가로서 대중들의 관심에 대한 결핍이 존재하며, 헨리는 아버지의 애정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두 사람 모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허구임을 알고 있음에도 애써 거짓을 끌어안으며 몸집을 부풀렸다. 하지만 이내 헨리와 사무엘은 한때 H를 믿었던 (혹은 스스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던) 자신까지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인다.

 

 

 

꿈을 꾼다는 건 삶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숨만 쉬면 된다’는 사무엘의 강압적인 말은, 극 후반부에 이르러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충분히 가치 있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의미로 전복된다. 헨리는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감추거나 바꾸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온전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헨리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단단하다.

 

 

*사진 출처 : (주)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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