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비인간’. 이 두 단어 사이가 가지고 있는 간격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자연스럽게 우리와 같지 않은 존재들을 통틀어 비인간이라 호칭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러한 호칭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니,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단어 자체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말이 맞겠다.
그랬던 내가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빈틈없어 보이는 단어들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김성중 작가의 장편 소설 <화성의 아이>를 읽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화성의 아이>는 “화성으로 쏘아 보낸 열두 마리의 실험동물 중 오직 나만 살아남았다”는 ‘실험동물 루’의 문장으로 책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첫 문장에서부터 알 수 있는 것처럼, 책의 이야기를 이끄는 주요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인간들의 입장에서 ‘비인간적’으로 여겨지는 존재들이다.
우주로 보내진 첫 번째 동물이자 유령 개 라이카, 로봇이지만 누구보다 인간적인 마음을 가진 데이모스, 실험으로 인해 태어난 인공적인 인간 외형의 존재 마야... 인간이지만, 눈꺼풀을 잃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키나까지, 모두 그렇다.
하지만, 과연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것에 ‘인간적이다’ 혹은 ‘인간성’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까?
오직 외형적인 것으로만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분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주 옛날에 상영되었던 한 로봇 영화에서, 로봇이 인간으로 여겨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그들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하여 판단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이때처럼, 우리는 ‘감정의 존재 유무’를 ‘인간성의 여부’로 보면 되는 것일까?
감정의 유무로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할 수 있다기에는, <화성의 아이>에 등장하는 개 라이카와, 인공적 실험 인간 마야와, 로봇 데이모스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이다. 그들은 모두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돌보고, 공감하고, 그 마음을 표현할 줄 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외따른 행성에 건설해 나갈 수 있을 정도의 지능과 감정을 가지고 있을 정도다. 감정의 기준이 된다면 이들이 비인간적인 존재로 읽혀지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나는 계속해서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 보게 되었다.
이 의문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준 것은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열린 토론 프로그램, <비인간 작가동맹을 결성한다면> 이라는 대담이었다. <화성의 아이>의 저자인 김성중 작가님부터, SF 문학계를 이끄시는 김초엽 작가님, 스페인 작가님이시자 <토끼들의 섬>의 저자이신 엘비라 나바로 작가님 세 분이 인간과 비인간을 주제로 이끌어 나가시는 프로그램이었다.
가장 먼저, “비인간이라는 단어는 문제적 표현이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나오게 된 표현”이라는 말씀이 와 닿았다. 김성중 작가님은 <화성의 아이> 속의 한 문장을 언급하시며,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만 ‘인간 아닌 존재들’을 규정하고 바라보고 있는지를 짚어 주셨다.
“라이카와 나는 태양의 주변을 도는 위성이며 인간을 양육하는 비인간이다. ‘비인간’이라는 표현 또한 인간에게서 빌려왔다. 이 표현은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를 뭉뚱그리는 말이기에 종 차별적이며 제한적으로 평등하다. 나와 라이카와 버섯과 박테리아 모두 평등하게 비인간이다."
그 말처럼 ‘인간’과 ‘비인간’의 단어 사이에는 중간이 없었다. 우리 인간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모두 비인간이라는 세 글자 단어로 규정하고 있다. 동물도, 식물도, 음식도, 괴물도, 실험체도 모두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비인간’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길래, 우리는 존재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자격을 얻은 걸까. 나는 왜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을 찾으려 애쓰고 있던 걸까?
“인간은 다른 존재들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상상을 펼쳐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엘비라 나바로 작가님의 말이 이러한 내 의문에 쐐기를 박아 주었다.
결국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려 애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화성의 아이>는 그 결말이 굉장히 특이한 책이다. ‘벼룩’ 콜린스가 화자로 등장하여, 유령 개 라이카를 만나고 그의 등에 붙어 살아가던 때의 이야기와, 라이카와 헤어지고 난 후 어떤 세계를 맞닥트리게 되었는지를 ‘벼룩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벼룩이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결말’을 전개하다니. 그야말로 센세이션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콜린스는 이야기를 끝마치기 전, 책의 한 페이지를 꽉 채우는 말 한 마디를 남긴다.
“나는 여기에 있다.”
김성중 작가님은 그날의 대담에서 결말 문장에 관한 비하인드를 얘기해 주셨다. “나는 여기에 있다.”는 문장을 가장 작은 존재가 발화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결말이라고 했다. ‘나는’은 <화성의 아이>를 이끌어 나갔던 8명의 화자를, ‘여기에’는 화성일지, 꿈일지 모르는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있다’는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어쩌면 작가님께서는 <화성의 아이>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비인간-이분법적인 잣대로 구분된 편견 속에 살아가면서도, 그들만의 온전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 나간 존재들에 대한 응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문장이다.
<화성의 아이>는 한 편의 픽션이지만, 분명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존재들이 어디에선가 존재하고 있을 것을 안다. 그렇기에 나는 오래도록 라이카와 데이모스와 마야와 콜린스를, 비인간적인 존재로 불렸지만 분명 인간적인 존재들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언젠가는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이분법적인 단어가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