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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및 창작자 발굴을 통해 실험과 도전, 가능성을 선보인 국립정동극장 세실 창작ing 기획의 연극 <도비왈라>가 9월 21일부터 10월 3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교육의 기회도, 삶을 선택할 기회도 얻지 못한 이들은 오늘도 갠지스 강변에서 온종일 고된 세탁 일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신식 세탁기가 도입될 거란 소식에 평화롭던 마을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뉜다. 도비가트의 유일한 여자 빨래꾼인 실파는 세탁기가 자신을 학교에 보내줄 것이라 굳게 믿으며 자신을 말리는 가족들을 뿌리치고 세탁기에 집착한다.

 

 

 

기술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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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북부를 흐르는 거대한 갠지스강. 갠지스강은 인도인들에게 단지 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힌두교의 성스러운 강인 갠지스를 사람들은 마시고, 목욕하고, 시신을 뿌린다. 그래서 갠지스강에는 인도인들의 한 생애가 담겨 있다. 그리고 성스러운 갠지스강물로 빨래를 하는 이들이 있다. 인도의 신분제인 카스트에 속하지도 못하는 불가촉천민인 도비왈라이다. 이들은 독하고 차가운 검은 물에 직접 몸을 담그고, 온몸으로 빨랫감을 치댄다. 현대적 개념의 세탁기는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발명되었다. 백색 가전의 등장은 삶의 풍경을 바꾸었다. 그러나 2025년 기준 인도의 세탁기 보급률은 17%. 이는 세탁기 지불/사용 여력이 있는 세대수의 문제기도 하지만 빨래와 건조 다림질까지 맡아 담당하는 저렴한‘인간 세탁기’ 도비왈라가 세탁기의 대체재로 존재하기에 가능한 수준이다. 아니, 이 말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도비왈라가 세탁기에 앞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연극 <도비왈라>는 도비가트 사람들의 일상을 파노라마처럼 나열한 뒤, 고급스러운 흰옷을 입은 한 정치인이 객석에서 일어나 늘어놓는 연설로 대사를 시작한다. 그는 도비 출신으로 40여 년 전 미국에 건너가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뒤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그는 정치인답게 자신이 써야 할 카드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출신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동네의 가장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고, 미국의 인종차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까닭은‘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이제 자신이 고향을 바꾸겠다고, 모두에게 평등한 교육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다짐의 말을 전한다. 그 브라만과 도비는 모두 갠지스강의 자식들로 평등해질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 구체 방식은 도비들의 빨래터를 치우고 세탁기를 도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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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수치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도비왈라의 평균 수명은 40대 정도라고 한다.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위험한 환경에서 고강도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실파와 프리타의 아버지는 이미 몸이 성한 곳이 없다. 9살의 실파를 학교가 아닌 빨래터로 부른 것은 실파에게 분수(혹은 종교적 운명)를 가르쳐주기 위함이기도, 자신의 몸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인도인의 평균 수명은 70세 정도. 도비왈라는 도비왈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30해의 시간을 사람들의 옷가지에 실어 보내는 셈이다. 시간을 거슬러 인도를 식민 통치했던 영국의 산업혁명 시기 가혹한 노동조건 하의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서른을 전후했다. ‘산업재해’와 같은 명확한 규정은 살에 스며든 노동의 흔적을 증명하기에 우스운 개념이 되어버린다. 그들의 상태는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는’, ‘골병’ 같은 애매한 말로 그나마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노동조건을 향상하는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가 안전 기술 도입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박노해 시인의 시 ‘손무덤’에는 공장에서 잘려 나간 손이 무덤처럼 쌓인 풍경이 등장한다. 수많은 노동자의 손가락과 손을 절단시킨 프레스기가 있다. 그러나 프레스기를 양손으로 쓰게 한다면 절단 사고는 나지 않는다. 단순한 기술이 도입되지 못했던/않았던 까닭은 손의 값이 더 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극 <도비왈라>의 주요 갈등 ‘빨래터를 세탁기로 교체하기’에 대한 찬반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앞 문단에서 나는 기술의 발전이 분명 노동자 안전과 인류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이렇게 사용되는 것이 아님 역시 사실이다. 정확히 하자. ‘아닌’ 정도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은 편향적으로 발전한다. AI로 만든 이미지와 영상은 이미 우리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 그러나 AI 이미지의 원형은 인간의 단순/위험 노동에 기대어 있다. 그럼에도 AI 기술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이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세탁기의 등장. 수많은 가전제품의 등장은 가사 노동의 무게를 줄여주었는가. 가전제품의 등장은 깨끗함과 바람직함의 개념을 바꾸었을 뿐, 누가 주로 가사 노동을 하는지, 가사 노동의 가치가 어떻게 저평가되는지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인도는 빠르게 발전해 왔고, 발전 중인 나라다. 그 말은 땅의 가치가 사는 곳(live)에서 사는 곳(buy)으로 변모해 가는 곳이라는 의미기도 하다. 정치인은 세탁기를 통한 평등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에는 이런 약관들이 함께 딸려있다. 예를 들어, 지저분한 빨래터를 지우기, 세제, 세탁기와 같은 신사업 유통망 확보(누가 이득을 보는가? 적어도 도비왈라는 아닐 것이다). 빨래터의 도비왈라들은 본능적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정치인의 말을 이해한다.

 

 

 

“쥐새끼들은 바로 너네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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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도비왈라>에서 ‘빨래터를 세탁기로 교체하기’라는 갈등에서 실제로 부딪히는 것은 지배계급-도비왈라가 아니다. 도비왈라끼리다. 왜냐하면 정치인과 브라만, 중간관리 계급의 이해관계에는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도비왈라 간 갈등은 언니 실파와 동생 프리타 사이에서 보인다. 언니 실파가 아홉 살부터 빨래터에서 10년간 일한 것과 대조적으로 수학에 재능을 보였던 세 살 아래 동생 프리타는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한 동네에서 남매처럼 유년 시절을 보냈던 라훌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세탁기 도입에 대한 계획을 설명할 때 실파는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을 때 라훌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세탁기가 생기면 하루 종일 빨래터에 있지 않아도 되고, 시간이 생기면 학교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훌을 제외한 가족들은 각자의 이유로 세탁기 도입에 반대한다. 프리타는 질문한다. 세탁기가 생기면 이 많은 도비왈라가 필요 없어지는데, 그러면 우린 어딜 가야 하느냐고. 실파는 그 질문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찬반투표가 가까워질수록, 여론이 세탁기에 반대할수록 실파는 세탁기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실파가 프리타의 질문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해서일 리가 없다. 이 기회가 없으면 다시 남은 인생을 검은 빨래물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만이 분명했을 뿐이다. 세탁기 사용법에 적힌 영어를 배우며 기뻐하던 실파의 웃음을 생각한다. 빨래는 너무 쉬워서 하루 만에 다 배울 수 있었는데, 같은 집에서 같은 밥을 먹는데도 읽을 수 있는 단어가 이토록 다른 동생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지은 쓴웃음을 생각한다.


실파는 자신의 소망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타지에서 온 매춘 여성 샨티를 빨래터에서 약물로 살해하기에 이른다. 빨래터의 위험성을 보여줄 극적인 사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이 단지 사건이 되어 저물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라훌은 세탁기가 도입되면 실파는 직업 학교에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말할 뿐이다. 실파는 자신이 원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은 단지 읽고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지, 다시 빨래터가 아닌 세탁기에 메인 인생을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고 울부짖는다. 자신을 이 땅에서 꺼내달라고 라훌에게 매달리지만, 친오빠 같던 라훌에게서 나온 말은 자신의 계급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브라만과 도비왈라는 갠지스강의 한 형제가 될 수 없다. 모든 기대가 꺾인 실파는 빨래터에 빠져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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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파와 프리타의 엄마는 늘 그들의 딸에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읽고 쓰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은 단지 우리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 고리를 끊고자 일으켰던 시위에서 엄마는 목숨을 잃었다. 실파와 프리타가 대립할 때면 실파에게 더 마음이 갔다. 실파가 옳아서가 아니라, 악에 바쳐 사지에 몰린 인간의 울부짖음은 학생인 프리타의 똑똑한 말보다 사실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 <도비왈라>의 마지막 장면은 프리타가 정치인과 라훌 앞에 나타나 부린 난동이었다. 프리타가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영민한 머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언니가 빨래터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습득하게 된 지배계급의 언어로 그들을 상대하게 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프리타는 도비왈라의 굳은살을 파먹는 진짜 쥐새끼들은 바로 너네들이라고 외치며 등장한다. 세탁기가 생기는지. 생기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너네들은 계속 잘 먹고 잘살 거니까. 그런데 샨티와 실파는 죽었으니까. 그것이 사실이니까. 프리타의 외침으로 연극의 핵심 갈등이었던 세탁기는 갈등의 지위에서 내려온다.


그 순간 무대를 칭칭 감싸고 있던 빨랫줄이 뚝 하고 떨어진다. 프리타가 세탁기가 아니라 사람과 싸우기로 결심한 순간이다. 그 결심과 함께 연극 <도비왈라>는 끝이 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싸움이 향할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프리타도 자신의 엄마와 같이 목숨을 잃게 될까? 그러나 다시 연극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본다. 정치인은 관객석에 앉은 우리들을 도비왈라로 상정했었다. 그렇기에 프리타의 외침은 혼자만의 것이지 않다. 관객석에 앉은 우리들도 그 외침의 몫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연극을 바로 연극이 펼쳐진 한국으로 유비하는 것은 거친 태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거칠게 유비한다고 그들의 하얀 옷이 더럽혀질 일은 없으니 좀 더 오만하게 혹은 담대하게 연극 <도비왈라>를 봐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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