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는 사실 내 여행 리스트에 없던 도시였다.
스페인을 여행하기 전 조사했을 때에도 알함브라 궁전이 유명하다는 정도만 들었을 뿐,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소도시라는 후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비야에서 이동하는 여정 속에 3일을 머물기로 하면서, 이 선택이 나중에는 참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비야에서 잠시 알부페이라 일대를 둘러보고 도착한 종착지, 그라나다. 늦은 저녁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쉬어간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알람을 맞추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알함브라 궁전 때문이었다.
알함브라(Alhambra) 궁전은 ‘붉은 성채’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한다. 13세기 나스르 왕조가 건설한 이곳은 약 250년 동안 이슬람 왕조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였다. 이후 1492년,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디난도 2세 왕이 이끄는 레콩키스타(국토 회복 운동)의 마지막 승리로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스페인은 오랜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났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궁전은 크게 알카사바라 불리는 군사 요새, 헤네랄리페 정원, 그리고 하이라이트인 나스르 궁전으로 구성된다.
나는 개장과 동시에 입장해 가장 먼저 나스르 궁전을 찾았다. 입장권이 한 달 이상 전에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은 곳이었기에, 발걸음이 더욱 설레었다. 궁전에 들어서자마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벽면을 가득 메운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과 아랍어 경구, 섬세하게 새겨진 대리석 기둥, 천장에 펼쳐진 별자리 같은 장식들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빛이 창문을 통과해 모자이크 타일 위로 부서지는 순간,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가 되었다. 곳곳에 흐르는 물길과 분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이슬람 양식에서 낙원을 상징하는 요소였다.
물의 흐름과 소리, 반사되는 빛까지 포함해 공간 전체가 살아 있는 예술이 되었다.
직선으로 정돈된 헤네랄리페 정원의 수로와 나무들은 그 질서와 조화를 더욱 강조했다. 좌우 대칭으로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고, 어딜 보아도 어긋남이 없는 조화로움이,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자연에서 완벽함과 세밀한 계산이 돋보였다.
그라나다의 강렬한 태양빛 아래에 푸릇한 나무와 꽃들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는 공원은 마치 오아시스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정원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탁 트인 전망 너머로 알바이신 지구의 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정원의 고요와 도시가 한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 속에서 과거 이슬람 왕조들이 느꼈을 평화와 풍요로움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였다. “이 궁전을 보기 위해 그라나다에 왔다”는 말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알함브라 궁전 관람을 다 마치고 나서 탁 드는 생각은 '아, 알함브라 궁전 보러 그라나다까지 오는 것은 타당하다!'
궁전에서 내려오는 길은 성벽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이었다.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비추는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니, 그라나다가 왜 산자락에 기대 앉은 도시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저녁에는 호스텔에서 만난 또 다른 혼자 온 여행자와 함께 식당에 갔다. 그라나다에는 특별한 식문화가 있는데, 술이나 음료를 주문하면 ‘타파스’라는 작은 안주가 무료로 제공된다. 우리는 맥주를 시켰는데, 정말로 곁들임 음식이 차려졌다. 예상치 못한 호의 같은 문화에 기분이 좋아졌다.
서툰 영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가다가, 그 동행은 자연스럽게 전망대까지 함께 걷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그라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전망대는 산 니콜라스 전망대다. 알바이신 지구의 언덕 끝에 위치해 정면으로 알함브라 궁전과 그 뒤로 펼쳐진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우리가 올랐을 때는 막 해가 지기 전, 도시 전체가 금빛으로 물드는 시간이었다. 궁전 위로 낮은 구름이 흘러가고, 하얀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진 알바이신 마을이 붉게 물들었다. 9월의 스페인은 해가 늦게 지기에 야경까지 기다리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의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그라나다는 분명 스페인 여행에서 흔히 첫손에 꼽히는 도시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그렇기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슬람과 가톨릭이 교차하는 역사,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준 알함브라 궁전, 그리고 타파스로 이어진 낯선 여행자와의 인연까지. 여행이 끝난 뒤에도 알함브라의 빛과 그라나다의 언덕길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흔히 ‘색다른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런 순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