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킨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 전집이 출간되었다. 미국 현대시의 대표적인 작가로 퓰리쳐상, 전미도서상, 전미도서비평가 협회상 등을 수상한 그의 글은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고독과 상실의 무게만큼이나 깊고 구체적이다. 이번 신간은 출간된 시집 북과 남, 어느 차가운 봄, 여행의 질문들, 지리 Ⅲ 4권과 그 외에 시집에 포함되지 않은 시들과 미출간 친필 원고 시들을 모두 수록하고 있어 비숍의 시상을 이해하는 데에 더할나위 없는 총망라집이 될 것이다. 평생 101편의 시만을 공개할 정도의 완벽주의로도 유명한 그가 친필 원고 이미지에도 여러 번 줄을 긋고 수정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 재미도 있다.
시를 내리 읽으면서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상은 고독이다. 생후 8개월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비숍이 5세 때부터 20여년 간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다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친가와 외가를 거치며 성장한 비숍은 고독과 더불어 베이스 캠프가 없는, 여행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일찍부터 이방인의 삶을 체득한 것이다. 성인이 된 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살다 브라질에서 10년 넘게 머문 뒤 애인의 자살 후 미국으로 돌아온 비숍의 방랑은 기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대표적인 시 <한 가지 기술>에서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삶을 바라보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잃어버리는 기술을 익히기란 어렵지 않다.
많은 일이 언젠가는 잃을 의도로 가득해 보이니
상실이 꼭 재앙은 아니다.
매일 뭔가를 잃어버릴 것, 문 열쇠를 잃었다는
당혹감을, 허투루 보낸 한 시간을 받아들일 것.
잃어버리는 기술을 익히기란 어렵지 않다,
더 많이 잃고, 더 빨리 잃는 연습을 할 것.
장소들을, 이름들을, 여행하려고 마음먹었던 곳들을.
이것들을 잃었다고 재앙이 오지는 않는다.
(후략)
우리는 누구나 잃음을 경험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 개인만의 재앙을 받아들이며 살지는 못한다. 나의 일이 무엇보다 참담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유년 시절부터 그 감각에 누구보다 익숙해져야 했을 비숍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담담하게 말한다. 심지어 더 많이, 더 빨리 잃는 연습을 하라고도 한다. 거대한 일 앞에서는 자연 앞에 겸허해지듯 개인의 문제가 일정 크기 이상 감각되지 않을 때가 있다. 결국 본질은 상대적이라는 것인데, 이 담담함이 읽는 이로 하여금 삶의 불가피함과 이유불문을 인정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순간들을 재정립하게 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소속감이 없다는 것은 고독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배치하고 탐구할 수 있다. 그러나 상실로 인한 고독, 어쩌면 무엇을 상실했는지조차 따지기 어려운 삶을 살아낸 그였기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 테다. 담담하고 강인하게 비숍은 자신의 삶을 시인으로, 이방인으로, 새로운 여행지로 배치시킨다. 비숍은 자신의 삶을 시를 통해 세차게 탐구했다. 동시에 과하게 연민하거나 관조하지 않고 그저 묘사한다. 그의 시에서 새와 배 같은 기동성을 가진 동적 요소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이 시인의 대담하면서도 골몰하는 매력을 일깨워주는데 일조한다.
또한 비숍이 경제적으로 비교적 부족함이 없는 생애를 보냈음에도 화려함보다는 목가적이고 자연의 모습을 담은 시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들과 함께 자연에 대한 묘사를 통해 시 속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 관조하는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그 중에서도 시 <어느 차가운 봄>에서 그 정서가 생생하게 전달받는 기분을 느꼈다.
어느 차가운 봄.
제비꽃이 잔디밭에 생채기로 솟았다.
두 주일이 넘도록 나무들은 망설였고,
작은 잎들은 기다렸다,
제 특징을 조심스레 드러내면서,
마침내 우중충한 녹색 먼지가
너의 크고 목적 없는 언덕마다 내려 앉았다.
(후략)
사후 50년이 되어가지만 그의 시에서 읽히는 감정은 낡지 않는다. 모두가 연결되기에 더욱 외로운 현대사회에서 그가 말하는 고독과 개인의 재구성은 오히려 공감을 이끌어 낸다. 상실이 곧 재앙이 아니라고 차분하게 써내리고, 스스로 바운더리를 찾아가는 비숍의 삶이 보여주는 정신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위로이자 공감이 된다. 시를 읽다보면 평온한 표현들 덕에 물리적으로 울퉁불퉁한 감정이 없어보이지만 그 기저에 수많은 사유가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비숍의 삶과 시들은 결국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꼭 써야만 했던, 인생의 전진을 위한 자화상과도 같다.
시집의 제목이 된 시 <상투스에 도착>의 마지막 두 문장은 그의 묘비에도 새겨졌는데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곧장 상투스를 떠난다. 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 비숍의 시에서는 질주와 멈춤이 공존한다. 앞선 시에서처럼, 담담하면서도 돌아보지 않는 뚝심이 느껴지는 동시에 자연을 관조하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두가지 낭만이 공존한다. 어떤 것의 부분이 아닌, 자기 자신 속에 뿌리를 내리려 한 그의 삶. 평생을 이방인으로 분투하고 그 뿌리를 파내려 한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어딘가로 질주하고 있을 것만 같다.
좋은 시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엘리자베스 비숍의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소속, 정체성, 해석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내는, 즉 자신이 원형 자체가 되려는 그 부단함 때문일테다. 가을을 앞두고 점차 시원한 바람이 콧날을 스치는 요즘, 이 계절에 맞는 묵직한 울림을 가진 비숍의 시집을 만나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