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늘 자신을 스스로 의심한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그림에서 느끼는 감정이 옳은 것인지 이상하게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그래서 꼭 설명문과 작가의 이름, 큐레이터의 해설을 찾아보게 되고, 그것들이 내 감상에 차곡차곡 덧붙여지면서, 어느새 작품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정답’을 확인하러 온 사람처럼 서 있곤 한다. 비앙카 보스커의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바로 그 지점을 찌른다. 저자는 갤러리의 벽을 흰색으로 페인트칠하는 일에서 시작해 작가의 작업실 조수, 미술관 경비원까지의 과정을 거치며 예술은 무엇이며, 왜 사람들은 여전히 예술 앞에서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지를 뉴욕 예술계 한복판에서 직접 느낀다.
무언가를 예술로 인식하는 데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예술 이론의 분위가 예술사 지식. 즉 예술계다. 우리가 차고에서 유아차를 몇 군데 손보고 그것을 자동차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자동차가 정말로 고속도로를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반면에 갤러리에 소변기를 가져다 놓고 비평가들에게 그 예술성을 격찬받으면 소변기가 조각 작품이 된다. 예술을 감상하는 법에 관해서는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며, 그중 하나인 고립주의는 맥락을 거부하고 작품 이외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고립주의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 판에서는 영향력 있는 내부자가 미술이라고 부르면 그것이 미술이었다. 작품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에 붙어 있는 묵직한 이름들. 즉 맥락이었다.
- 108p 발췌
저자는 현대 미술의 모순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전시장 안에서는 작품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담론, 권력, 이름값이 더 크게 작동한다고 말한다. 어떤 작가의 점 하나는 ‘걸작’이 되고, 무명의 붓질은 한낱 취미로 치부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역시 종종 그 맥락을 의식하며 작품을 바라본다. 그래서 전시장은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증명하는 장소로 기능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이 찾고자 하는 색깔을 찾아 평생을 바치는 예술가와 작품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관객도 있다. 허세와 냉소, 집착과 경이. 서로 모순적인 듯 보이는 이 모든 풍경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미술계였다.
이 책이 특히나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경험을 낱낱이 해부하듯 서술하면서도, 결국 “예술을 본다는 행위”에 귀결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단순히 내부의 부조리를 폭로하거나 풍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 앞에서 멈춰 서서 느낀 떨림, 열정,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감각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서술한다.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술이란 정답이나 지식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결국 전문가의 것이 아니라, 작품 앞에 선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오늘 본 그림이 내일은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가 보는 방식, 내가 느끼는 감각이 예술의 한 부분을 완성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바로 예술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것이다.
인간의 뇌는 현실을 작은 방울로 압축하는 엔진으로 진화했다. 정신적 에너지를 아껴야만 덤불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잡아먹으려 하는 포식자를 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먹이가 아닌 존재로 진화하게 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내 생각에 우리의 뇌는 쓰레기 분쇄 압축기에서 현미경으로 탈바꿈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과정에서 예술이 발생했을 테다. 예술은 우리의 본능이 현실에서 줄기를 쳐내고 가지를 생략하려 드는 시도를 막는 수단이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것을 알아채고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더 많은 것에 공감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예술은 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우리의 삶이 각자가 수집한 경험의 총합이라면, 예술은 그 경험을 압축하지 않음으로써 말 그대로 우리가 같은 시간에 더 큰 삶을 살게 한다. 예술은 삶을 음미하는 연습인 동시에 음미할 가치가 있는 삶을 창조하는 연습이다.
- 374~375 페이지 발췌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자신을 돌아보는 긴 에세이에 가깝다. 저자는 미술계의 화려한 겉모습 뒤편을 비추면서도, 끝내 독자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전시장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출근길에 스쳐 지나가는 빛, 카페 창가에 놓인 의자,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 같은 장면에도 적용된다. 익숙해서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넓어진다.
예술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지가 아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고, 낯설어서 불편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앞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예술이 인간의 본능적 압축 습관을 멈추게 하고, 더 많은 것을 알아채고 더 넓게 공감하도록 돕는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같은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크기의 삶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겐 하루가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 하루가 여러 겹의 색과 감정으로 쌓여 더 큰 삶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그 단순하지만 잊기 쉬운 진실을 다시 일깨운다. 예술은 전문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작품 앞에 선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술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새롭게 태어난다. 전시장 안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