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다닐 트리노토프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 3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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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줄일 수 있는 마법 같은 방법이 있다. 바로, 그 사람의 맥락을 알아가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이 불편하게 다가와도, 그 행동의 배경과 이유를 이해하게 되면 많은 것이 달리 보인다. 더 깊은 생각의 흐름까지 들여다보게 되면, 그 사람들을 보다 더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예술, 그 중에서도 미술에 대해 잘 몰라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맥락을 선물한다. 관광에서 유명한 미술관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체 뭘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미술에 대해 깊은 통찰이 없는 사람은 작품을 응시하는 것으로만 그 너머의 세계를 읽어내긴 어렵다. 그래서 저자는 예술이 그렇게까지 폐쇄적이고 고립되어 있어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진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순수 미술이 내포하고 있는 그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미술계를 헤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클래식을 접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제목처럼, 그 때 나는 대뜸 예술의 전당에 서 있었다. 스파이보다는 이방인에 가까웠던 그 포지션에서 클래식 음악을 통해 뭘 느껴야 하는 가에 대한 혼란을 느낀 시기였다.
프로그램북에 쓰인 설명은 전문 용어가 난무하고, 낭만 고전 시대는 무엇이며 이 작곡가는 어떤 사람인가 어려울 틈도 없이 정말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후 더 알아가기 위해 책을 읽고 공연을 보러 다니고 다양한 음악을 들었다. 혼란의 시기를 겪고 난 후에야 나는 좀 더 클래식 음악의 깊은 사랑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저자 비앙카는 그보다 좀 더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브루클린의 작은 갤러리에 말단 직원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아트 페어에 참여해 VIP 티켓이 진정 VIP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아픔을 겪기도 하고, 그림을 하나도 판매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작품과 함께 살아가기까지한다.
비앙카는 다정하게도 그 모든 과정을 가감없이 내비치고 보여준다. 독자들은 그 흐름을 함께 따라가며 비앙카가 만난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을 함께 읽는다. 그 과정 속에서 독자들의 마음 속에 자연스럽게 사랑이 자라기 시작한다.
때때로 예술은 생각보다 더 현실적이다. 공연을 하나 기획할 때에도 공연장 규모, 현실적인 스태프 운용 방안, 구현할 수 있는 자금의 상한선 등 생명력 없어 보이는 가지들을 보다 먼저 고려해야한다. 그 현실의 장치들을 철저히 감춘 뒤 관객들은 낭만만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미술을 대하는 사람들
미술도 마찬가지였다. 아트 페어와 전시회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해당 전시의 주제보다 전시장 규모와 판매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종류의 그림, 그리고 캔버스의 규격을 먼저 따져야 했다. 그렇게 완성된 컬렉션은 비록 주제에 조금 어긋날지라도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들에게 더 높은 수익을 올려준다.
하지만 그 과정이 금전적인 상황만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아주 오래 전부터 구축해온 미술 생태계에서, 꾸준하게 오래 버틴 이들은 바로 그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미술 곁에 머무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이들의 타협과 선택에서 오히려 더 깊은 사랑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책 속 그런 사람들을 보며 언젠가 공연 기획 일을 할 때가 떠올랐다. 홍보용 전단지를 배포하기 위해 회사 측에서 고용한 어르신이 있었다.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 티켓 부스에 서 있던 나 조차도 약간의 쌀쌀함을 느낀 날씨였다. 어르신께 건넸던 전단지를 생각하며 지금 쯤이면 집에 가셨으려나를 떠올리고 있던 때였다. 그 어르신이 공연장에 들어와 티켓부스로 다가왔다.
"나도 이 공연을 보게 해줄 수 있나요?"
어르신께 전단지 배포는 자금을 위한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공연의 곁에 함께할 수 있는 또 다른 애정의 수단이었다.
어떤 갈래
결국 이 책을 모두 읽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미술을 바라 보아야 하는가, 어떤 예술이 아름다운 것인가, 그리고 어떤 통찰을 가져야 하는가. 나는 이 모든 질문들에 결국 이런 결론을 내렸다.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이 질문들을 위한 도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건 결국 여러 갈래로 예술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해온 맥이 있기 때문에 이 분야가 이어질 수 있었다는 시선이 아니었을까.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속 에피소드들은 미술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결국에는 미술을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미술을 더 사랑해볼 마음을 먹게 되었고, 미술을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저자 비앙카의 용기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비앙카가 미술계에 내던진 용기처럼 한 분야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과정은 이런 것임을 받아들이는 즐거운 여정의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