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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아이가 들어와도 되나요?” 예전에 카페에서 한창 일하던 때, 아이를 동반한 보호자들은 꼭 내게 같은 질문을 먼저 해 왔다. 거절에 익숙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던 보호자와 아이의 얼굴은 나의 대답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내가 근무했던 카페는 아이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소위 ‘노키즈존’이 아니었기에 나는 보호자에게 들어오기를 권했다. 긍정의 대답을 들은 보호자와 긴장감이 풀린 아이의 얼굴에는 화색이 돋았지만, 그간 그들이 겪었을 거절의 횟수를 감히 상상해 보면 분노와 씁쓸함이 동시에 들어 똑같이 웃지 못했다.

 

아이라는 존재가 사회에서 규정되는 모습을 보면 지나치게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성장 과정에 있기에 성인보다 부족한 점이 많고 그래서 약하기에 보호해 줘야 한다는 입장과 서투르고 실수가 잦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타인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입장이 공존한다. 기본적으로 아이는 약하기에 무시받는다. 어른들은 아주 쉽게 아이를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아이를 앞에 두고도 걱정을 빙자한 험담을 대수롭지 않게 내뱉기도 한다. 어른의 시선에서 아이는 어른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모든 말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민감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티를 내지 않을 뿐,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민첩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 이 점을 아주 쉽게 간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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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나 미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아이들의 장난감>은 아이들의 시선이 어른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섬세하고 기민할 수 있음을 말하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발랄하고 장난스러우며 가끔 당황스러운 노래도 튀어나오지만, 이 작품의 빼어난 점은 초등학교 6학년인 주인공 쿠라타 사나를 포함해 그녀 또래 인물의 시점까지 작품 속에 그려내며,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회의 이면―입양, 학교 폭력, 교권 문제 등―을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순수하고 해사한 얼굴 속에 감춰진 아이들의 상념은 밝은 분위기와 대비되어 진지함을 강조하고, 이 점은 작품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명과 암이 선명한 <아이들의 장난감>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인기 아역배우 사나가 다니고 있는 진보 초등학교 6학년 3반은 평범한 교실과는 풍경이 다르다. 하야마 아키토를 중심으로 남자 아이들이 담임선생님에게 심한 장난을 일삼으며 면학 분위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수업 자체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교실 안은 망가졌지만 담임선생님은 물론 다른 어른조차도 여기에 개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담임선생님과 체육 교사가 학내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한 이가 바로 하야마이며, 그가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야마는 증거 사진을 협박처럼 들고 다니며 어른들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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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마가 어른에게 이토록 적대적으로 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야마의 입장에서는 담임선생님과 체육 교사가 일터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것 자체가 교사의 의무를 위배한 것과 다름없다. 작중에서 하야마는 학생들의 만행을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외치는 체육 교사를 비웃듯 이런 대사를 날린다. “어른들의 범주 따위 다 들통 났다고.” 물론 하야마의 행동은 도가 지나치지만 다른 의미로 생각해 본다면 그는 어른답지 않은 어른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야마의 가정사와도 연결된다. 어머니가 자신을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픔을 지닌 하야마는 누나의 멸시를 받으며 ‘악마’라고 불린다. 아버지마저 어린 하야마의 양육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방관한다. 아직 초등학생인 하야마는 매번 끼니를 인스턴트로 때우며 기본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는 불안한 환경에서 성장한다. 어른이지만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역설. 때문에 하야마에게 어른이라는 존재는 애당초 신뢰할 수 없는, 겉과 속이 다른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어른에게까지 이행되며 선생님뿐만 아니라 사나의 매니저인 레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어른들은 하야마를 그저 불량아 또는 처벌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 근본적인 문제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직 같은 나이대의 사나만이 하야마의 악행에 원인이 있고, 그것이 어른의 이중성을 향한 반항임을 알아본다. 

 

어른의 속내를 면밀하게 파악하는 모습은 사나에게서도 드러난다. 유명 소설가 쿠라타 미사코의 딸인 사나는 실은 어릴 적 친모에게 버림을 받고 현재 어머니를 만나게 된 과거를 가지고 있다. 미사코는 언젠가 사나에게 이러한 과거가 담긴 수필을 발표할 것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고, 얼마 뒤 수필집 『딸과 나』가 발간되면서 사나는 친모를 만나게 된다. 십 대 때 사나를 낳았다는 두려움과 아이를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그늘진 친모의 얼굴을 본 사나는 잠시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무거운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애써 밝은 얼굴로 친모를 대한다. 일부러 장난과 자조가 섞인 말을 덧붙이며. “마음 쓰지 마세요. 전 오히려 버려져서 행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생활이 너무 마음에 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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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가정을 꾸린 친모에게 어린 딸이 있음을 알게 된 사나는 함께 놀이동산에 가자고 먼저 제안한다. 특유의 명랑함으로 친모와 이복동생을 즐겁게 해 주며 시간을 보낸 사나는 처음 친모와 마주했을 때처럼 복잡한 심경을 숨긴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친모는 사나에게 언젠가 함께 살게 될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러운 바람을 내비치지만 사나는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건 아니죠. 그럴 수 없어요. 저는 당신을 어머니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고… 확실히 말해서 당신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어요. 당신과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어요.” 사나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친모는 자신을 버린 뒤부터 지금까지 버린 딸을 죽은 사람 취급했을 거라고. 만일 자신이 아역 배우로 성공하지 않았다면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눈물을 흘리는 친모 앞에서 사나는 냉정하게 자기 생각을 드러내면서도 따스함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친모에게 자신을 낳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자그마한 위로의 메시지를 남긴다.  때로 아이는 어른보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상황을 바라볼 줄 안다. 

 

2기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아이가 어른보다 성숙하고 정의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게 뚜렷이 드러난다. 중학교에 입학한 사나와 하야마는 전보다 통제적인 환경에 놓이게 된다. 특히 불량아였던 하야마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교사 센고쿠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가라데부를 만들려는 아이들의 계획을 방해하기도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라데 부원으로 새로 들어온 나카오가 자취를 감추자, 센고쿠는 이 일을 하야마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그를 퇴학시킬 계획까지 세운다. 나카오가 사라진 이유에는 담임인 센고쿠의 지분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사실이 나카오의 자필 편지에서 밝혀지지만 센고쿠는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편지의 뒷면을 의도적으로 빼버리는 치졸함까지 보이며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한다. 반면, 사나와 하야마는 사라진 나카오를 찾으러 분주히 뛰어다니고, 크게 다치면서까지 나카오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개인적인 감정에만 매몰된 센고쿠와 이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나와 하야마는 사뭇 대조된다. 

 

교무 회의 날, 사나와 하야마의 친구인 후카는 센고쿠가 감춘 편지를 찾아내고 또래 친구들과 합심해 교무실에 나타난다. 여기는 학생들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만류에도 아이들은 정의를 지키는 쪽을 택하며 센고쿠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린다. 결국 나카오가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센고쿠가 이를 간과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게 된다. 이때 사나는 아이들을 대표해서 소신을 밝힌다. “우리들, 아이들은 말이죠. 늘 어른들을 신경 쓰며 살아요. 어른들이 마음대로 만든 사회에서요. 어리지만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똑바로 하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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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눈에 띄는 지점은 기묘하게 뒤틀려있고 이기심과 비열함이 엉켜있는 사회에서 몇몇 어른들은 시니컬하게 반응하거나 각자도생을 택하지만, 대다수의 아이는 용기와 사랑의 필요성을 언행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사나는 하야마가 가족과 오해를 풀고 화해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야마의 생일이 어머니의 기일과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중간 생일’을 정해 그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속 깊은 면을 보인다. 하야마는 사나의 출생 비밀이 대중에게 공개되어 곤란해질 걸 알자마자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식사와 잠자리를 내어주고, 진심 어린 말로 보듬어준다. 어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장난감> 속 아이들은 어른의 잘못된 부분을 예리하게 꼬집지만, 한편으로는 미숙한 어른의 지친 마음까지 어루만져주며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품도록 도와준다. 타인의 고민에 진심으로 경청하고 쉽게 낙담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아이들의 태도는 냉소적인 어른들과 비교되어 돋보인다. 이따금씩 정의감과 다정함을 지키며 사는 게 쉽지 않더라도 말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그려진 가상 세계와 우리의 현실은 밀착해있다. ‘어리다’라는 형용사는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곡해되고, '노키즈존'이라는 단어까지 생성되면서 아이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어른이 무슨 권리로 아이를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아이가 어른보다 모든 면에서 서투르고 감정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촘촘한 겹으로 쌓여 있고, 그들은 그 겹을 하나씩 뜯어보며 질문하기를 잘한다. 다 커 버린 어른들이 보지 못하거나 회피하는 부분을 아이들은 단박에 잡아낸다. 즉, 세밀하고 깊은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며, 아이들 덕에 세상이 그나마 정의롭게 굴러가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아이들은 영원히 미숙하지 않다. 평생을 어린아이인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먼 훗날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서 노쇠해진 우리에게 어째서 자신들을 배척했느냐고 묻는다면, 과연 무어라 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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