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문인 조위한이 집필한 17세기 고소설 <최척전>은 잦은 전란으로 인해 이별하지만 끝끝내 해후하는 조선시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2025년 9월 재연을 올린, 고선웅 연출의 <퉁소소리>는 그런 <최척전>이 원작인 ‘블록버스터 연극’이다. <퉁소소리>를 블록버스터 연극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대 미술이나 효과의 웅장한 규모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의 규모 때문이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등장 인물들의 경로는 조선에서 일본, 중국,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아주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퉁소소리>는 마을 잔칫날의 마당극에서 발화되는 이야기라는 설정을 통해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그러한 의도 때문에 무대의 바닥면은 한옥의 대청마루를 닮아 있다. 무대 뒷면의 배경 역시 ‘시공간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는 수묵화 같은 연출’을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도록 여백의 미를 활용한다. 이와 같이 무대의 가로축과 세로축은 변화의 유연성을 담는다. 이 공간 안에서 스무 명의 배우가 전란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와 가족애를 놓지 않는 최척과 옥영 가족의 기가 막힌 인생사를 재현한다.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력은 물론이고, 무대 세트와 소품의 압축적인 사용 또한 역사적 고통을 군데군데 유머로 승화시키며 관객의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데에 도움을 준다.
조선의 평범한 백성인 유생 최척과 규수 옥영은 연서를 교환하며 혼인을 약속한다. 그러나 최척이 임진왜란 시기 의병으로 참전하며 혼례가 미뤄진다. 전쟁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첫 아이 몽석도 낳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도 잠시, 정유재란이 발발하며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첫 아이의 행방은 묘연하며, 피난길에 남장을 한 옥영은 한 일본인 상인의 보조로 팔려가고, 가족 모두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최척은 망연자실해진다. 전란의 폐허 속에서 퉁소를 부는 최척. 그 피리 소리에 이끌려 온 명나라 장수는 다 잃었지만 목숨은 잃지 않은 최척에게 그래도 살 것을 당부한다. 최척은 자신을 비호하는 명나라 장수의 일을 도우며 함께 다니게 된다.
수 년 후, 친우와 함께 장사를 시작한 최척은 우연히 안남(베트남)에서 옥영과 자신만 알던 시 구절을 듣는다. 애타게 찾던 옥영을 만나게 된 최척. 옥영이 남자 부하인 줄만 알았던 일본인 상인은 이 해후는 하늘의 뜻일 거라며 옥영의 몸값을 받는 대신 은자를 내주며 옥영을 풀어준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이다.
이야기의 발화자이자 연극의 해설자인 노 최척(사실은 나이 든 최척이 아니라 <최척전>을 집필한 작가 캐릭터이다)이 우리 가족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가 2부에 더 남아 있다고 운을 띄울 때 나는 제법 두려움을 느꼈다. 왜란 두 번 겪고 먼 나라에서 가족을 만난 것으로도 이야기가 끝이 아니라니 또 무슨 고생이 남았는지 차마 짐작하기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1부와 2부 사이에는 많은 시간이 흘러 지역과 인물 관계도의 변화 또한 많았다.
2부는 명나라에 자리 잡은 주인공 부부의 차남 몽선과 몽선의 연인 홍도의 혼례로 시작된다. 명나라 여인 홍도 또한 전쟁 탓에 가족과 생이별한 인물이다. 홍도는 왜란 당시 조선으로 파병 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언젠가 조선에 가 아버지를 찾을 수 있도록 조선말을 배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지난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전란은 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2부의 주요 사건은 명청교체기의 반란이다. 조선인이지만 명나라에 사는 데다가 유능함이 알려진 최척은 명 황제의 명령으로 후금의 반란을 진압하는 군대에 투입된다.
후금이 곧 청나라를 세우고 명나라가 멸망하는 역사를 아는 만큼 관객들의 머리가 아파오는 대목이다. 패배할 결망이 정해진 군대에 차출된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인생은 이상할 정도로 새옹지마라는 것인지, 최척은 후금 군대의 포로로 잡힌 동안 옛날에 잃어버린 장남 몽석과 상봉하게 된다. 두 부자의 상황을 알게 된 후금 군인 한 명이 자신은 사실 조선 출신의 이주자임을 밝힌다. 그의 도움으로 도망친 두 부자는 최척의 고향인 조선 남원 땅으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둘은 홍도의 아버지까지 만나게 된다.
두 번의 생이별을 참을 수 없었던 옥영은 과거 상인의 보조로 있을 때 익힌 여러 언어와 항해술을 바탕으로 직접 배를 타고 조선 땅에 가기로 한다. 옥영, 몽선, 홍도는 때에 따라 조선, 중국, 일본 복장과 언어를 넘나들며 국적을 속이고 위험을 모면한다. 그러다 심각한 위기를 맞고 옥영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찾아오지만 살아 있으면 좋은 순간이 온다는 말을 떠올리며 생의 의지를 다잡는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최척 부자와 홍도의 부친, 옥영과 차남 내외, 그리고 조선의 고향에 있던 다른 가족들이 모두 만나며 본 이야기가 끝이 난다.
2부에서는 옥영의 계획이 위험하고 터무니없다고 느껴지다가도 조금 지나면 그렇게라도 해야 했던 옥영의 절박함이 더 먹먹하게 다가왔다. 오죽했으면, 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머니의 계획을 반대하던 차남 몽선의 마음을 돌린 것은 아내 홍도의 효심이었는데, 나는 이때 홍도의 대사가 인상 깊었다. 실낱 같은 희망이 있다면 흔들림 없이 시도하려는 홍도의 결심은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더라도 유골이라도 찾아 제사를 지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했다. 홍도가 자신에게 외국어인 조선말로 소통하느라 말투는 어눌해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너울처럼 울림 있게 다가왔다. 홍도 뿐만 아니라, <퉁소소리> 안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간의 소통 장면이 나온다. 때로는 그 서툰 언어 교환이 코믹하게도 그려지지만 중요한 지점은 그 소통으로 여러 진실과 진심이 교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울림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퉁소소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최척의 퉁소 연주는 갑작스러운 이별의 슬픔을 예감한 옥영을 최척이 달래던 주막 장면에서 나온다. 이후 퉁소 연주가 나오는 장면들은 전란 속의 장면들이다. 정유재란의 폐허에서 흘러나온 퉁소 소리는 최척이 명나라 장수와 만나게 했다. 이 만남으로 혈혈단신이던 최척은 전쟁터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후금 군의 포로로 잡혀 있을 때 다른 조선군 포로들을 위해 했던 또 한 번의 퉁소 연주는 조선 이주민 출신인 후금 군 관리자로 하여금 고향에 있는 모친 생각이 나게 했다. 그리움에 젖은 그는 최척 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 둘을 풀어주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도, 장르도 너무나 다르지만 특히 명나라 장수와의 장면에서 나는 영화 <부산행>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군인 한 명이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으레 좀비의 접근인 줄 알고 총을 쏠 준비를 하다가 생존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가 인간임을 알게 되는 장면이다. 군인은 놀라서 일어서고, 다른 군인과 함께 생존자를 구조하러 간다. <퉁소소리>를 감상하는 동안에는 그래도 음악이란 연관성만으로 너무 먼 두 작품을 연결짓는 게 무리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멋쩍어졌었다. 그러나 감상을 복기하고 연극 내용을 분석하니 왜 그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는지 스스로 납득이 되었다. 폐허 속 사람이 있는 줄 몰랐던 상황에서, 도저히 음악이 들릴 수 없을 것 같은 때에 소리의 파동으로 사람을 인식하는 순간이 닮아 있다.
이 지점에서 ‘퉁소소리’의 의미에 대해 더 고찰해 보았다. 정유재란의 일본군들이 조선 사람을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내기를 하거나 조선 여인을 모욕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특히 침략 당한 국가의)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전쟁의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다. 혹여 목숨을 건졌다 해도 삶의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 넋을 놓는 사람들 또한 본다. 그래도 사람들은 옆사람이 목숨을 끊으려 하면 그를 만류한다. 최척 또한 그런 만류를 받은 사람 중의 하나였고, 그가 무심코 연주한 퉁소의 선율이 목숨을 놓지 않은 그를 도왔다. 퉁소소리는 전란의 폐허 속에서 사람이 사람을 발견하게 해 주는 매개체였다. 후금 군인의 경우까지 더하면, 그렇게 연주자의 생존을 돕는 한편 듣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인간됨을 일깨우는 효과가 있었다고 느낀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내면의 많은 부분을 차단해 둬야 했을 텐데, 타인에게 온정을 베풀 수 있을 만큼 (아마도 본래 가지고 있었을) 공감과 연민이라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퉁소소리가 상징하는 바는 생의 의지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극한 상황 속에서도 목격되는 ‘인간됨의 공명’은 아닐까.
<퉁소소리>는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연출이 돋보이지만 전쟁과 반란으로 인한 이별과 고난을 다루고 있는 만큼 리뷰를 쓰기 위해 내용을 복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데이식스 원필의 <행운을 빌어 줘>를 반복해서 들었다. 긴장감이 들어 있지만 경쾌하게 들리는 선율, 행복과 행운을 빌어달라는 가사에서 기운을 얻었다. 연극 <퉁소소리>가 관객에게 선물한 마지막 인삿말 '안녕히 사세요'를 떠올리면, 글을 쓰는 동안 내게는 이 노래가 일종의 '퉁소소리' 역할 비슷한 것을 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도 '몇 번의 볓 번의 절망'과 '또 몇 번의 몇 번의 희망'이 계속될 테지만 하루하루 또 힘을 내기 위해 한 곡의 노래에 기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삶이란 사실을 잊었다가 떠올리고, 또 잊고, 또 실감하기를 반복하면서. 각자의 '퉁소소리'가 되어주는 선율을 떠올리며 비가 오거나 햇빛이 드는 삶을 또다시 버티고 안녕히 살아가시길. 아무쪼록 우리 모두의 행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