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동화는 늘 따뜻하고 명랑한 이야기다.
그러나 어떤 동화는 정반대의 얼굴을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2006)와 장 피에르 주네·마르크 카로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5)는 동화의 형식을 빌리지만, 아이들이 맞닥뜨리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폭력과 착취다. 두 작품은 ‘잔혹동화’로 어른들이 만든 세계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죽음을 통해서만 열리는 출구 - ‘판의 미로’
1944년 스페인 내전 직후. 어린 소녀인 주인공 오필리아는 임신한 어머니와 함께 파시스트 장교인 아버지가 지배하는 산속 주둔지로 들어간다. 계부인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사랑을 주지 않고, 어머니는 병든 몸으로 무기력하게 시들어간다.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오필리아는 낡은 미로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서 만난 판은 그녀를 ‘지하세계의 잃어버린 공주’라 부르며 세 가지 시험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두꺼비의 뱃속에서 열쇠를 꺼내오는 것, 두 번째는 연회장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금기를 지키는 것. 그러나 오필리아는 유혹에 굴복해 음식을 집어 들고, 기괴한 괴물을 깨워 가까스로 도망친다. 마지막 시험은 더욱 가혹하다. 막 태어난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피를 바쳐야 한다는 것.
결국 오필리아는 동생을 살리고 총에 맞아 죽는다. 영화는 그녀가 지하세계의 공주로 맞이받는 장면을 덧붙인다. 나레이션은 “공주는 아버지의 왕궁으로 돌아갔고 정의와 온화함으로 왕국을 다스렸다”고 말하지만, 현실과 환상이 모호하게 뒤섞인 이 결말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 가능한 허구의 해피엔딩처럼 다가온다.
〈판의 미로〉는 스페인 현대사를 압축한 은유로도 읽힌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무기력해진 제2공화국 세대를, 의사는 민주주의 이상을 간직한 지식인을, 주인공 오필리아는 끝내 소멸했으나 기억으로 남은 공화국의 꿈을 상징한다. 그녀의 희생은 순수한 피 위에 미래 세대가 이어졌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상을 지키려다 사라진 한 세대를 의미한다.
결국 오필리아가 마주한 세계는 현실의 폭력을 반영하는 또 다른 시험장이었고, 그녀가 도달한 환상조차 파시즘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었다.
어른들의 욕망이 잠식한 꿈 -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음울한 항구 도시에 사는 늙은 과학자 크랑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노화를 거부하기 위해 아이들의 꿈을 훔쳐 젊음을 유지하려 한다. 납치된 아이들은 기계 장치 속에 갇혀 강제로 악몽을 꾸고, 크랑크는 그 악몽을 빨아들이며 생명을 연장한다. 거구의 남자 원은 동생이 납치되자 거리의 고아 소녀 미에트와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음모에 맞서지만, 그들이 마주하는 풍경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난쟁이 자매, 사이보그, 의체를 가진 괴물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이 공간은 마치 악몽이 현실화된 무대 같다.
결국 미에트는 과학자 크랑크의 꿈 속으로 들어가 아이를 구출한다. 점차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간 크랑크는 끝내 꿈 속에 갇혀 폭주하다 파멸하고, 아이들은 억압에서 풀려나 함께 도시를 빠져나온다.
이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은 그저 어른들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실험 재료로 고통받는다.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미래 그 자체이며, 아이들의 꿈이 강제로 추출되는 장면은 곧 다음 세대의 가능성이 착취당하는 것에대한 은유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의 환상적인 비주얼은 결국 자본주의적 착취의 구조를 드러낸다. 아이들의 꿈이 상품처럼 소비되고, 어른들의 욕망이 미래 세대를 고갈시키는 사회.
이 영화의 동화적 세계는 결코 아이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 사회를 비추는 거울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아는 현실의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 또 다른 시험과 희생 속에서 생을 마친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는 아이들의 꿈이 어른들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자원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두 잔혹동화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라는 차이를 지니지만, 공통적으로 권력과 욕망을 폭로하며 아이들은 가장 취약한 희생양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비극 속에서 우리 사회의 민낯 또한 비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