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01[70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05012756_qrqsplaw.jpg)
도자를 보는 시간
차 보다는 찻잔을, 찻잔보다는 더 오래된 도자를 좋아한다. 교과서에 실릴 만큼 잘 알려진 빗살무늬 토기부터 고려청자, 조선백자, 그리고 공예품들까지, 그 안에는 시대마다 다른 서사가 다채롭게 담겨있다.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을 사로잡았던 도자 몇 점을 소개한다.
분청사기 인화 승렴문 병
![도02[70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05012827_ldnwybqe.jpg)
리움미술관 소장 분청사기 인화 승렴문 병은 풍만한 하단의 몸통에서 탄력 있는 기운이 느껴진다. 좁은 목으로 통과하는 곡선을 따라 올라가면, 안에서 밖으로 힘이 발산되는 듯하면서도 완만한 실루엣 덕분에 부드러움으로 이어진다.
빼곡히 찍혀 있는 승렴문은 빗방울처럼 보이며 일정한 층을 이루는데, 몸통을 따라 위로 시선을 올리면 마치 빗방울이 거꾸로 치솟는 듯한 역류의 긴장감이 감돈다. 그러다 마지막 목 부분에 이르면 모든 점을 삼켜내며 고요해지는 듯하다.
요변천목다완
![도03[70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05012935_lllnhcbn.jpg)
후지타 미술관 소장 ‘요변천목다완(曜変天目茶碗)’은 중국 남송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목 다완이다.
신비로운 푸른빛 유약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일본으로 여행 올 때 배 위에서 본 검푸른 바다의 아득한 수심이 떠올랐다.
그 안에 시선을 집중하면 세밀하게 그어진 토끼털 무늬를 발견하게 되는데, 품 안에 들어온 작은 토끼와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사이의 낙차를 느끼며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해주’가 새겨진 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
![새13[70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05013027_bgmfoadt.jpg)
‘해주’가 새겨진 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은 조선 초기 공납용으로 진상된 기물이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분청사기들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 조금씩 다른 매력을 지녔다.
내가 본 ‘해주’가 새겨진 분청사기 인화무늬 대접은 마침 한여름 장마가 막 지난 무렵이어서인지, 유약의 초록빛이 숲의 윤기를 닮은 녹진한 색으로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이 세 도자의 아쉬운 공통점은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누가 흙을 빚고, 굽을 깎고, 유약에 담가 가마에 구웠는지 알 수 없다. 어떤 마음으로 작업했는지는 그저 짐작할 뿐이다.
작가의 작업노트
![도06[70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05013139_uwlxxohz.jpg)
그래서 나는 작가의 작업노트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지워지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만큼 생생한 스케치, 짧지만 분명한 메모, 선으로 그어진 실타래들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의 내밀한 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치 편지봉투를 열 듯 설레며 그 흔적을 따라간다.
작년 겨울 갤러리에서 본 작가의 작업노트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 속 영혜가 그려져 있었다. 그 책을 읽고 영혜의 삶에 마음 아파하던 때였기에, 작가와의 공감이 생기며 한 발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익명으로 남겨진 도자와 달리, 기록은 작가가 동시대에 박동한다는 증거였다.
도예가의 작업 방식
![tesr00[70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05013203_lkkiuhcg.jpg)
<차를 담는 시간>의 첫 장에서 도예가는 굽을 깎지 않은 기물에 자신을 비유한다. 덕지덕지 붙은 흙처럼 무겁고 어지러운 삶을 살았다는 고백에 공감했다. 물레를 돌리고, 소성하는 도자의 제작 방식은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흙 반죽을 물레 위에 올려놓고, 스케치한 종이를 따라 형태를 잡아간다. 이때 작가는 라디오도 음악도 없이, 고요함으로 작업에 몰두한다. 손끝의 집중이 흙 가운데로 모여들 때, 엄지손가락을 살짝 힘주어 누르면 구멍이 생긴다. 단순한 동작임에도, 그 순간 흙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 또한 작가의 손을 따라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바다 노을 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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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업 중에는 오묘한 자주색을 닮은 그릇이 있다.
어딘가로 흩어지는 듯한 노란빛이 스며들어 있어 아름다운 매력을 더한다. 노을 지는 하늘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날이면 주변 지인들이 어김없이 하늘 사진을 보낸다고 한다.
따뜻한 정경을 담아내고 싶어 ‘바다 노을 도자’ 작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도04[70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9/20250905013342_clzccvpw.jpg)
학교를 다니며 문득 하늘을 올려다볼 때가 있다. 세탁소 거품 같은 구름, 거울이 비칠 듯 순정한 하늘, 크레파스의 12색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햇빛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핸드폰을 기울여 사진을 담는 사람들이 주변에 보인다.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들의 마음 덕분에 풍경의 채도가 올라가는 기분이다. 그래서 작가의 바다 노을 도자의 이야기는 삶의 자락과도 겹쳐져 더욱 반갑게 들렸다.
하루를 채우는 감각의 기록
이름 없는 도자기들은 이제는 사라진 시대의 사회문화를 짐작하게 하지만, 그 안에 가려진 개인의 삶은 쉽게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작가의 노트는 더욱 소중하다. 한 사람이 다가오는 듯하다.
작가의 작업을 대하는 태도와 일상 속 풍경이 새로운 감각의 향기와 함께 전해진다. 그것들은 자연히 삶에 녹아들어 하루를 채워주는 마중물이자, 마르지 않는 우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