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과 땀으로 보낸 시간 끝에, 친구가 독립영화 두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감상했다. 불이 꺼지고, 친구가 만든 세계가 거대 스크린 속에서 펼쳐졌다. 상영회의 첫 영화는 ‘미몽’이었고, 두 번째 영화는 ‘두 줄’이었다.
‘미몽’은 자기소개, 또는 수상소감과도 같은 나레이션과 독특한 촬영 구도가 인상적인 영화였다. 주인공 ‘남우’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이자, 대배우를 꿈꾸는 배우 지망생이기도 하다. 동네 카페 알바생인 그는 매일 무대 위에서 감사한 이들을 호명하며 영광을 누리는 대배우의 삶을 그려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사장에게 혼나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지금 남우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던 남우에게 자기소개 영상을 제출하라는 전화가 걸려온다. 갈망했던 것들이 성큼 다가온 기분이다. 남우는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워 죄송하다는 말을 되뇌며 긴 터널을 지나 언덕 위로 굽이굽이 올라간다. 숨이 끝까지 차오를 때쯤 도착하는 그곳에 남우의 집이, 아니 방이 있다. 높은 계단 아래 보이는 것은, 희망차고도 조급한 남우의 얼굴이다. 그는 언덕을 오른다. 한 여자가 계단에 떨어트린 토마토를 짓밟고도 개의치 않으며, 자신의 최고점을 향해 달린다.
남우는 ‘연기’하고자 하는 마음과 연기하며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허물없는 몇 마디를 영상에 담는다. 특출난 경력이나 장기보단,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꺼내본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는 주최 측에서 자신을 또 다른 ‘남우’와 헷갈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작 몇 분 뜀박질했는데, 막다른 길이다. 그 ‘남우’는 어쩌면 이 ‘남우’가 꿈꿨던 영광 어린 수상소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토마토를 밟아서였을까? 밟지 않았더라면, 밟았어도 함께 치워주기라도 했다면,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을까? 불긋하게 얼룩진 신발이 남우의 밤을 공허로 물들인다.
누구나 주인공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거대한 세상의 시선과 기준 앞에선 영원한 단역으로 전락하는 초라함을 맛보게 된다. 남우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우린 그의 모습에서 ‘짠함’을 느낀다. 내 미래는 왜 이토록 작고 희미한지, 닿지 않는 질문과 답답함에 공감했다. 후회와 좌절에도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시작점을 오래도록 기다려 온 사람이라면, 남우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딪히고 닳아 자꾸만 작아지는 삶을 연민이나 과장 없이, 미지근한 일상의 온도로 담아낸 영화였다.
두 번째 영화 <두 줄>은 붉은 낚싯대가 ‘두 줄’을 그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영과 미선, 너무도 다른 두 인물이 영화의 30분 호흡을 이끈다. 미선은 미용실에서 일하며 아이를 갖길 원하는 여성이고, 다영은 동네 노래방에서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는, 원치 않게 아이를 가진 고등학생이다. 미선은 우연히 두 줄이 새겨진 다영의 임신 테스트기를 보게 된다. 그것과 다영을 번갈아 보는 미선의 얼굴에 복잡한 기류가 묻어나며 영화가 깊어진다.
흰 우유를 마시며 담배를 피는 다영은, 낙태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다영은 인근 낚시터로 가 ‘동길’에게 자신의 사정을 퉁명스럽게 꺼내어 놓는다. 동길은 듣기만 할 뿐, 어른으로서의 대책이나 조언은 건네지 않는다. 다영은 어른들이 자신을 도우려 해도, 결국엔 “살려달라”는 말엔 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엔 “내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내포하기 때문이다. 오가며 밥 한 끼나 상냥한 조언 한마디 정도는 건네도, 아이의 깜깜한 눈동자를 오롯이 책임질 어른은 어디에도 없다.
다영의 한숨에 화면이 전환되며 미선이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달걀 프라이를 까맣게 태울 정도로 깊은 생각에 잠긴 그녀는 이내 몸을 씻고 거울 앞에 앉는다. 이때 전화가 걸려오고, 발신인은 남편이다. 그는 마치 시험 결과를 묻듯 미선의 임신 여부를 묻는다. 어두운 표정의 미선은 집에 와서 이야기하잔 말로 통화를 마무리한다.
해가 지고서야 낚시터에서 돌아온 다영이 북적이는 미용실을 지난다. 다영을 본 동네 아주머니들은 단숨에 뛰쳐나와 미선의 임신 소식을 전한다. 관객은 상황이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미선은 결국 자신보다 한참 어린 다영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올해까지 아이를 가지지 못하면 ‘헤어짐’ 당할 것이고 자신은 죽게 될 거라며 다영의 아이를 줄 수 없겠느냐고 묻는다. 다영은 처음엔 거절하지만, 결국 두 인물은 아이를 중심에 둔 기묘한 거래 관계를 맺으며, 동네를 떠나 둘만의 공간에 체류하게 된다.
영화는 ‘아이’의 존재가 각 인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층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이 거래의 시작으로, 삶의 희망이 없던 다영은 계속 살아가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거친 탈색모를 검게 물들이고 편한 옷을 입으며, 오랜 시간 담배와 술은 꿈도 못 꾸게 되었다. 미선은 마치 첫 아이를 키우듯 다영에게 밥을 해먹이고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서사를 보며, 친구의 연출 의도 중 “가족이란 니즈 충족의 관계이기도 하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미선은 남편에게, 다영은 미선에게 아이를 주어야 한다. ‘아이’의 존재와 각자의 결핍으로 묶인 관계로서, 그 누구도 포기하지 못한 채 아슬아슬한 상황에 동참한다.
‘두 줄’은 미선과 다영의 거래이자 연대에 주목하며, 아이와 가족의 존재를 숭고하고 따뜻하게만 그려내는 상투적인 전개 방식을 거부한다. 이로써 출산 담론이 확대되는 사회에 색다른 질문을 던진다.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 속의 ‘불임’ 여성과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는 청소년에게, 임신과 출산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가. 붉은 두 줄은 아이의 존재를 넘어, 그 무엇보다 분명하게 살아 숨 쉬는 두 주인공을 상징한다. ‘두 줄’을 위해 맺어진, 나란히 놓인 두 갈래의 인생. 어떤 모양으로 뻗어나갈지 답을 주지 않은 채, 영화가 막을 내린다.
상영회 때 “영화를 함께 만들며 공동예술의 의미를 깨달았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많은 사람이 한 스크린을 바라보며 함께 무언가를 느끼고, 영화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글도 쓰면서 여러 개의 세계가 구축된다. 그렇기에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가 중요하다.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두 영화의 공통점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사회의 구석을 비춘다는 데 있었다. 멀리 있는 듯 가까운 삶들과 불편함에 외면했던 주변을 다시 마주하며, 머리와 마음이 잔잔히 무거워졌다. 시퍼렇게 어두운 터널과 언덕을 지나는 남우, 흰 우유에 담배를 곁들이는 다영, 어린 딸을 장난스레 다그치는 손님을 보며 밤안개같은 눈을 한 미선까지. 볕이 들지 않는 곳을 들여다보는 두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