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차 호주로 떠나 시드니에서 며칠을 보내고, 브리즈번에 도착한 첫날, 잔뜩 흐린 하늘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유명한 ‘BRISBANE’ 사인을 보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중, 저 멀리 전광판에 흐르는 화려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발레 공연이었다.
호기심에 인터넷에 검색해 살펴보니 바로 오늘 저녁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짧은 망설임 끝에,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발견은 놓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공연 1시간 반 정도 전에 공연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티켓을 구매하려는 나에게 직원은 한눈에 보기 좋은 시야의 몇몇 좌석을 추천해주었고, 그중 하나를 골랐다. 공연장 주변엔 이미 화려한 착장의 관객들이 많았고, 기다리다 들어간 공연장은 그에 걸맞게 아름다웠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환상과 감동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음악과 춤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무용, 음악, 무대미술이 참 화려하다. 대사 하나 없이 오로라 공주의 탄생, 저주, 사랑,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여정이 장면마다 생생하게 살아난다. 특히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단순한 반주가 아니라 극의 흐름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제1막의 경쾌하고 밝은 선율은 제2막에서 카라보스가 등장하는 순간 날카롭고 어두운 음렬로 전환되며 관객의 심장을 조여오고, 제3막에서는 사랑의 낭만과 서정을, 제4막에서는 화려한 축제의 열기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처럼 음악의 변화에 집중하다 보면, 발레리나들의 움직임이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음악을 시각화한 생생한 감정 그 자체임을 느낄 수 있다.
각 장면은 화려한 장식이 달린 무대장치들과 어우러져 주인공들인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의 움직임으로 가득찬다. 요정들의 우아한 변주부터 왕국 사람들의 활기찬 군무, 다양한 동화 속 캐릭터들의 유쾌한 무용까지, 무대 위에서는 쉴 새 없이 새로운 볼거리가 펼쳐진다. 오로라와 왕자의 무용은 그저 한참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스토리의 흐름을 미리 알고 관람한다면, 각 장면이 주는 상징성과 아름다움에 훨씬 깊이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요정들의 선물, 개성의 춤사위
제1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오로라에게 선물을 주며 차례로 춤을 추는 여섯 요정들의 변주다. 각 요정은 ‘우아함’, ‘용기’, ‘순수함’, ‘열정’ 등 각기 다른 성격을 상징하며, 이는 그들의 춤사위와 의상, 음악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날렵하고 빠른 동작의 요정이 있는가 하면, 부드럽고 여린 선을 강조하는 요정도 있다. 이들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오로라의 인격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조력자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모든 것을 지켜보는 리라 요정이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카라보스의 사악한 에너지와 대비되는 선과 지혜의 상징이다. 그녀의 동작은 차분하고 위엄 있으며, 무대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춤은 마치 평화와 안정 그 자체다. 그녀의 존재는 제1막의 화려함 속에 이미 훗날 펼쳐질 구원의 서사를 암시하며, 극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장면 하나에도 발레의 정교함과 상징성이 응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긴장의 극치, 로즈 아다지오와 극적 전환
16세 생일 잔치에서 오로라가 네 왕자와 추는 '로즈 아다지오(Rose Adagio)'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발레의 최고 하이라이트이자, 발레리나의 기량을 가르는 최고의 시험대이다. 오로라는 한 다리로 선 채로 각 왕자에게서 장미를 받고, 왕자와의 춤 사이사이에 혼자 서서 균형을 잡는다. 이때의 그녀는 단아함과 자신감,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관객석에서는 말 그대로 숨소리가 사라진다.
갑자기 음악이 사악하고 날카롭게 변하고, 조명이 어두워지며 카라보스가 나타난다. 화려한 축제 분위기는 순식간에 공포로 뒤바뀐다. 오로라의 춤은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결국 그녀는 예언대로 방추에 손을 댄다. 이 극적인 전환은 차이콥스키의 뛰어난 극음악적 역량과 무용수들의 표현력이 만들어낸 순간이다. 화려함 속에 숨어있던 비극이 단숨에 표면으로 튀어나오는 이 장면은, 발레가 단순한 춤이 아니라 드라마의 모든 요소를 갖춘 종합 예술임을 증명한다.
환상과 낭만, 그리고 사랑의 구원
리라 요정의 인도로 필리프 왕자는 잠든 오로라가 있는 성을 찾아간다. 제3막의 '환영 장면'은 마법과 같은 서정미로 가득 차 있다. 은은하고 몽환적인 조명 아래, 오로라의 영혼 같은 모습이 나타나 왕자와 춤을 춘다. 이 춤은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약속이다. 두 사람의 춤은 제2막의 로즈 아다지오와는 또 다른, 부드럽고 유연하며 내적 정서가 가득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들의 2인무는 대사 없는 발레가 어떻게 사랑의 감정을 순수하게 전달하는지 보여준다. 참 아름다웠다.
마법 같은 키스로 오로라가 깨어나고, 제4막은 그들의 결혼식으로 펼쳐진다. 이곳의 백미는 각종 동화 속 캐릭터들이 선사하는 다채로운 캐릭터 무용이다. 장화 신은 고양이와 백조 공주, 빨간 모자와 늑대, 파랑새와 공주 등이 각자의 개성 넘치는 안무로 축하를 건넨다. 이는 마치 발레 안의 미니 발레 축제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마지막에는 모든 무용수들이 무대에 올라 웅장한 군무를 펼치며 오로라와 왕자의 사랑을 축복한다. 화려한 의상과 장엄한 음악, 완벽에 가까운 단체 퍼포먼스는 관객에게 압도적인 감동과 환희를 선사하며 마법 같은 밤의 대단원을 장식한다.
*
브리즈번의 우연한 밤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완벽한 선물 같았다. 악역 카라보스의 강렬한 존재감, 각자의 역할과 개성으로 무대를 빛낸 수많은 군무원, 그리고 특히 여섯 요정의 독특한 춤사위는 이 작품을 빛냈다. 오로라 공주와 왕자님도 반짝 반짝 빛이 났다.
4막에 걸친 장면 구성은 조직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탄생의 기쁨, 비극의 절정, 낭만의 구원, 축제의 화려함이라는 극적 흐름이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발레리나들의 춤, 화려한 무대 장치와 의상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관객을 다른 세계로 데려갔다.
이 공연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자칫 유치하거나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3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유치함이 아니라 장엄함과 경이로움으로 전환시키는 마법을 보여주었다. 무대 위에서는 마법이 현실이 되었다. 발레리나들의 혼신의 움직임, 한순간도 흐트러짐 없는 집중력, 그리고 그들을 통해 구현되는 캐릭터의 혼은 관객으로 하여금 동화 속 세계로 완전히 빠져들게 만들었다.
공연을 통해 브리즈번 여행의 첫날밤을 낭만과 만족, 행복으로 가득찬 채 잠들 수 있었다. 예술이 주는 가장 순수하고 값진 기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