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고통을 치유할 수 있을까. 완전한 치유는 아니더라도, 예술을 통해 아픔의 일부는 잊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은 예술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느끼며 마음을 위로받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가진 힘은 그만큼 강력하다.
아름다움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모양이나 색깔, 소리 따위가 마음에 들어 만족스럽고 좋은 느낌’이다.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실재(實在 : 실제로 존재함)하는 무언가가 미의 기준에 맞을 때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도, 불완전한 형태에 가까워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까. 이를테면 목숨 걸고 싸운 군인의 망가진 얼굴, 삶이란 길을 힘겹게 걸어온 조각가의 절뚝이는 다리를 향해서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인 여성 조각가 ‘안나 콜먼 래드’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파리에 ‘초상가면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초상가면 스튜디오는 전쟁 중 상처를 입어 얼굴이 파괴된 군인들을 위해 가면을 만드는 곳이었다. 얼굴이 손상된 군인들은 프랑스어로 ‘Gueules cassées’, 깨진 얼굴이라 불렸다. 안나 콜먼 래드는 가면으로 깨진 얼굴을 덮고, 아픔을 어루만져주며 그들 삶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으로 군인들의 상처 입은 얼굴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마음과 인생 일부도 치유했다. 한 군인은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은 더 이상 저를 혐오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안나 콜먼 래드의 헌신은 오늘날 ‘Anaplastology’, 즉 손실·변형된 얼굴이나 신체의 중요한 부위를 해부학적으로 재건하는 의학의 뿌리가 됐다. 가면 생산엔 약 한 달이 걸렸다. 예전 사진을 참고해 얼굴 석고 모형을 만든 후, 아연 도금 구리로 가면을 제작했다. 쓰는 사람의 피부색과 비슷하게 칠해진 가면은 안경으로 고정했다. 가면엔 실제 머리카락을 활용한 눈썹, 속눈썹, 콧수염이 붙기도 했다. 가면은 수명이 짧았고, 초상가면 스튜디오는 얼마 후 문을 닫았다. 하지만 군인들은 낡은 가면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면은 새 인생을 살기 위한 희망과 용기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보이스 오브 햄릿 : 더 콘서트>로 연이어 창작 초연 뮤지컬을 제작한 이모셔널씨어터가 또다시 신작을 선보였다. 2025년 8월 6일에 개막해 11월 9일에 막을 내리는 뮤지컬 <르 마스크>는 서울 대학로 et theatre 1에서 공연 중이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조각가 레오니 역은 박란주, 홍지희, 나하나, 이지수가 연기한다. 사명감으로 출전했다가 얼굴에 부상을 입은 귀족 군인 프레데릭 역은 이창용, 현석준, 임정모, 임진섭이 맡았다. 잡화점 직원이자 레오니를 짝사랑하는 페르낭 역엔 박근식, 장두환, 박주혁이 출연한다. 안나 콜먼 래드를 모티브로 창작된 마담 래드 역은 김지민, 정영아가 연기한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았던 레오니는 한쪽 다리를 절지만, 조각가란 꿈은 포기하지 않는다.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세상에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초상가면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레오니의 열망은 재능과 열정, 또한 결핍과 열등감에서 나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 높은 신분·많은 재산 등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 신념과 귀족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프레데릭. 그는 전쟁으로 원래 얼굴도, 단단했던 정신도, 약혼녀 르네에게 청혼하겠단 결심까지도 전부 잃어버렸다. 그는 르네가 애타게 기다리는 줄도 모른 채, 그녀가 선물한 만년필을 쥐고 두려움이란 미로를 헤맨다. 그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슬픔과 고통, 가면을 써도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단 무력감이다.
잡화점 직원 페르낭은 짝사랑하는 레오니를 도울 때 행복하다. 다리가 불편한 그녀 대신 무거운 재료를 덥석덥석 들어주는 건 아무렇지 않지만, 마음을 보여주는 건 어렵다. 낮은 신분에서 비롯된 열등감은 용기를 앗아가고, 귀족 프레데릭을 질투하게 한다.
레오니는 프레데릭의 가면, 즉 ‘데뷔작’을 완성하려다 큰 실수를 저지른다. 적나라한 상흔을 가리는 가면을 거부하면서도 과거를 그리워하던 프레데릭은, 르네가 변해버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무너진다. 자신도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다고 세상에 매달리던 레오니. 아픔에 짓눌리면서도 르네와의 추억에 매달리던 프레데릭. 그들은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늪으로 완전히 끌려 들어가진 않는다. 그럼에도 살고 싶고,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르 마스크>는 적당한 온도의 공감과 위로를 다루는 작품이기도 하다. 레오니와 프레데릭은 연인도, 친구도 아니지만 서로가 가진 아픔을 잘 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감정은 연민과 인류애, 우정뿐이다.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만큼은 절대 들키기 싫은 상처를 타인에게 꺼내 보이면 마음이 편해질 때도 있다. 타인은 내게 기대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먼 사람이 건네는 온기에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열등감·자격지심·인정 욕구·무기력함을 가진 인물들에 공감하는 건 자연스럽다. 꿈을 향한 집착, 소중한 것을 잃고 무력감에 빠지는 것,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을 보편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레오니·프레데릭·페르낭은 각자만의 결핍을 견디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등장인물 네 명 중 유일하게 실존 인물 기반 캐릭터 마담 래드는 결핍에서 벗어나 있다. 초상가면 스튜디오를 소개하고, 후반엔 스튜디오 운영을 고민하는 것 외엔 캐릭터 고유 서사나 극 전체 갈등에 관여하는 바가 적은 건 아쉬운 점이다.
다리가 불편한 레오니, 전쟁으로 얼굴이 망가진 프레데릭은 전형적인 미의 기준, 즉 아름다움의 첫 번째 의미에는 어긋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의 두 번째 사전적 의미는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함’이기도 하다.
레오니와 프레데릭은 상처 입었고, 서툴며,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답을 못 찾은 사람들이다. 레오니는 옳다고 생각한 일에 골몰하다 실수했고, 프레데릭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한 공포에 휩싸여 자신을 오래도록 괴롭혔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선하고 따뜻하다. 무언가를 지키려 기꺼이 자신을 내던질 줄도 알고, 넘어진 타인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용기도 가졌다. 그래서 그들은 아름다운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