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인데, 기둥도 없이, 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혀놓은 건축이 있는가?
(김기진, 「문예월평」, 『조선지광』, 1926.)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한국 문학 내 내용-형식 논쟁이 발발했다. 김기진은 박영희의 소설을 혹평하며 계급의식에만 치우쳐 소설로서의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박영희는 예술은 “큰 기계의 한 치륜”이므로 투쟁기의 문학은 투쟁적이여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후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 계급의식은 희미해지고,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며 생계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었고, 불평등은 비가시적으로 심화되었다. 글로벌화를 통해 전 지구가 연결되면서 세계는 일률적으로 변해가고, 절대적 미와 부가 형성됐다. 생활 여건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개인 간의 폭력을 부추기는 현대 사회는 극단적 자본주의를 향해 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대 문화산업은 최첨단 기술을 통한 형식미는 화려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진정성이 비어 있다. 즉 지붕은 화려하게 금칠했는데, 기둥도 서까래도 부실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좋은 방향-나쁜 방향 어디로 나아가고 있을까. 나는 현대 사회가 양방향으로 동시에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점이 앞서는 순간, 현대 사회는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투쟁기 속에 있다. 사회에 내재해 있는 부조리함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오히려 1920년대보다 더 복잡하고 전 지구적인 투쟁의 한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은 여타 문화예술 중 가장 먼저 사회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장르다. 현대 문학은 하나같이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도달해 있다. 현대 사회애서 개개인은 인간이 저지른 폭력에 의해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중이다.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떠올린다. 예술은 ‘불편’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라도.
모두가 불편하지 않은 예술은 현실을 왜곡하고,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린 이야기다. 창작자 혹은 수용자 누구의 이야기도 포용하지 못하는 일률적인 이야기.
‘불편한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창작자는 의도를 가지고 선택한다. 현실을 그럴듯하게 감출 수 있는 장면 대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방한 장면과 대사를 고르고 편집한다.
다음은 수용자의 몫이다. 창작자가 의도를 가지고 생산한 서사를 각각의 맥락에 맞추어 해석한다. 변화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불편한 작품을 만났다면 기쁜 마음으로 현재 상태를 들여다보자. 나는 지난 주 연극 ‘미러’를 관람했다. 극 중 아덤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쓴다. 아덤이 선택한 대사와 장면은 희망이 없는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연극을 보고 난 후, 나는 이 시대에 창작자의 의도는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하며, 진정한 예술을 어떻게 지향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으로 이 글을 시작했다.
단순하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다. 불편한 감정으로 세상의 뒤틀림을 발견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예술은 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