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1. 버스 -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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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한 피로가 이마 위에 차곡차곡 쌓이면, 잠은 도망가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린다. 눈을 감아도 풀리지 않는 이 거슬림이 결국 두통을 만든다. 언제였더라? 전날 7시 30분에 서초동에서 공연을 보고, 바로 다음 날 또 다른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위였던 것 같다.


입추가 지났다더니 더위는 여전히 기승이고, 부스스한 머리칼은 주체가 안 된다. 버스 내부가 무척이나 시원하지만, 에어컨 바람이 유달리 머리 위로 쏟아져 거슬린다. 게다가 눈 아래엔 기다란 ‘나른함’이 드리워져 있다.


공연을 보고 또 공연을 본다는 이 동사의 반복이 참 즐겁지만, 체력적인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다는 걸 요즘 실감한다. 매일매일 봐도 좋겠다—했지만, 공연을 하나의 책임감 있는 선택지 안으로 밀어 넣고 나니 뭐 하나 마음 편히 보기 어렵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겠다 다짐해도, 보통 상대가 그렇게 두지 않는다.


이러니 늘 재밌게 놀 거면서도 가는 길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시간을 내어 늦잠을 자면 되지 않나 싶겠지만 생체시계는 또 너무 정확해서 몇 시에 자든 아침 6시 30분이면 눈을 뜨게 만든다.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있다 보면,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이마가 유리창에 통통 부딪힌다. 이틀 연속 공연이라니, 괜찮은 선택이었을까? 아무리 궁금한 연주가들이 나온다 해도, 이런 상태에선 감탄보다 시니컬한 생각이 앞섰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간다거나, 취소의 선택지는 없었다. 이렇게 나약한 소리를 해봤자 막상 가면 잘 놀지 않는가. 내향인의 익숙한 패턴이랄까. 외출을 귀찮아하면서도 막상 친구들이 불러주면 누구보다 행복하게 놀고, 집 가기 전엔 아쉬워하지 않는가. 그런 셈이다.


역시 운동이 답인가 싶기도 하다. 요즘 내 주위에는 정말 다양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발레, 수영, 라인댄스, 클라이밍, 테니스, 스쿠버다이빙… 일상에서 이런 장르의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런 걸 할 수가 있구나?


마냥 신기해하며 ‘그런 건 어쩌다가 배웠대?’ 싶기도 하다가, 타인의 시선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 취향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좋은지 설명하려 하면 답이 없다. 그냥, ‘좋아서 좋다’.

 

꽤 본능적인 영역에서 이 장르의 매력을 발견했기에, 가끔은 내가 운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취향의 형태감을 이토록 농밀하고도 역사 깊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어 와 준 장르가 아니던가. 그것도,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만의 표현을 담아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는!!


클래식에 눈을 두고 있으니 주변으로부터 ‘너도 악기를 배워봐’식의 말을 종종 듣곤 한다. 글쎄—이 부분에 대해선 상당히 회의적이다. 레슨 선생님은 무슨 죄인가? "어머, 고객님 바이올린 좋아하신다면서요? 어떤 곡 배워보실래요?” 하면,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6번이나 풀랑크 소나타 2악장이요!”라고 대답할 수도 없잖은가.


취향을 좁혀 나가고, 발견을 누적하기도 바쁜 와중이다. 진짜, 사람은 행동하기 나름이라지만 6월에 아무 생각 없이 꿈꿨던 일들이 8~9월부터 실현되기 시작하니 신기할 노릇이다. 스스로 원했던 바람 안에서 도출된 결과치를 충족시키는 과정을 살아가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 그걸 버텨낼 힘이 있었을까? 그건—아니다. 아침마다 7층 계단을 오르는 게 전부인 나로선 체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루의 무념무상을 위해선 결국 7시간은 자야 하는데… (매일 새벽에 잠들기)

 

 

 

2.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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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사람이 잠이 부족하면 안 하던 실수도 곧잘 하지 않던가? 공연을 보러 가던 8월 21일, 딱 그런 짓을 했다. 내려야 하는 역보다 한 정거장 일찍 내려버린 것이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예전에 예술의전당 공연 보려고 3호선을 탔다가 인파에 치여 남부터미널 전 역에서 내려버린 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퇴근 시간의 교대역을 아시는가? 입에 올리기도 무서울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에 비하면 21일은 훨씬 한적한 길가였기 때문에 ‘오… 바보네?’ 하고 자조한 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마침 해의 기세가 좀 줄어든 오후의 시간이었고, 습기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귀여운 수달 벽화도 있어 안구 정화 타임을 가졌다. 조금 걷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니, 한강공원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었다. 신영체임버홀이 이런 위치에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유튜브 생중계로만 보던 ‘아트엠콘서트’를 실제로 보러 갔다. 마침 ‘이든 콰르텟’이 출연하는 날이었고, 영상 속에서만 보던 체임버홀이 실제로는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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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아트엠콘서트’는 현대약품이 2009년 5월부터 이어오고 있는 클래식 공연 시리즈다. 매달 셋째 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이 무대는 다양한 연주가들과 클래식의 매력을 나누며,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하우스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된다. 2013년부터는 온라인 생중계를 더해 더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클래식 대중화에 기여하는 대표적인 메세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거기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출연진과 간단한 인터뷰를 하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참여자들과 퀴즈를 풀며 교류하는 시간도 마련돼 있다. 꽤 인터랙티브한 공연이다.

 

사실 그날은 공연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동시에 피로의 그림자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요즘 공연을 자주 보고 후기를 쓰다 보니, 내 글쓰기 패턴을 하나 알게 됐다. 

 

공연이 끝난 뒤 당장 쏟아낼 단어가 없다면, 하루나 이틀쯤은 멍하니 잊거나 보이지 않는 감정을 축적하고 해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20일 공연의 다음 날은 비워둬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여유도 없이, 바로 또 다른 거대한 ‘감정’과 새로운 ‘장소’ 앞에 나를 밀어 넣었다.

 

발걸음은 분명 가벼웠지만,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버스에서 내려 나무 사이를 거닐며 곧 깰 잠이라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러다 오늘은 그냥 멍하니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이 내 ‘취향’이 정말 ‘정답’인지 확인할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사람이 무언가에 시선이 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상이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그날 내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물음은 이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는가. 음악일까, 사람일까, 아니면 그 사이를 흐르는 소리일까.

 

전날 공연의 여파로 (너무 잘 즐기는 바람에) 괜한 잡념이 하나둘 끼어들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다. 내가 내 재화와 시간을 들여 너를 좋아하는 일이 정말 내 마음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습관처럼 쫓아가는 건지—소리가 그 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결국 답은 무대 위에 있지 않던가. 어쩌면 오늘의 공연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무언가를 확인하러 오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나고, 갈 사람은 가는 법이다. 나는 지금 어두컴컴한 것에 머리가 잠식돼 있으니, 그들에게 공을 넘겨버리면 된다. 왜냐고? 나는 지금 고단하니까. (zzz)

 

 


3. 신영체임버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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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공연장은 신영증권 건물 1층에 있었다. 건물 간판이 높이 걸려 있어 여기가 맞나 잠시 머뭇거렸지만, 카페를 통해 들어가니 금세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일찍부터 직원 두 분이 친절한 미소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어서 길게 헤맬 일은 없었다.


출입구 근처 카페에 진열된 책을 구경하다가, 유튜버 탱로그의 『클래식 왜 안 좋아하세요?』를 발견했다. 속으로 조용히 한마디 얹었다. ‘내 말이—’


입장 시간이 7시부터라길래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공연장에서 종종 인사를 나누던 선생님과 딱 마주쳤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운 좋게도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공연 시작 전 잠깐 짐을 두고 온 사이에 카페에서 휘낭시에까지 사다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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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처음 들어가 본 신영체임버홀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고, 의자가 두 개씩 짝을 이루어 놓여 있었다. 뒤편에는 생방송을 위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열마다 의자 배열이 조금씩 달랐다. 어디에 앉아도 무대를 또렷이 볼 수 있도록 세심히 신경 쓴 것 같았다.


유튜브로만 보던 사회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민 선생님을 실제로 뵈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깔끔한 딕션으로 진행을 이끌며 공연장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고, 중간중간 큐카드에 메모하며 다음 인터뷰를 준비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4.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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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아트엠콘서트 181회에서는 두 곡의 현악 4중주가 연주되었다. 첫 번째 곡, 멘델스존의 현악 4중주 1번은 젊은 시절의 밝고 서정적인 기운이 가득한 작품으로, 특히 2악장의 경쾌한 선율과 마지막 악장의 화려한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이어서 연주된 라벨의 현악 4중주는 라벨이 남긴 유일한 현악 4중주로, 다채로운 음색과 리듬을 활용해 개성을 드러낸다. 줄을 튕기는 피치카토가 돋보이는 2악장,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3악장, 강렬하고 화려한 4악장이 차례로 이어졌다.


공연 시작 시간이 다가오면, 기대가 조금씩 앞서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기대가 충족될지, 아니면 불시에 찾아오는 무게감에 잠식될지는 결국 그날의 ‘소리’와 ‘연주’에 달려 있다.


늘 그렇듯 내가 쓰는 리뷰 안에는 내 판단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들이 뻗어내는 표현의 결을 그저 양손으로 붙잡을 뿐이다. 과연 내가 찾는 답을 조금이나마 스쳐 지나갈까?

 

뭐, 멘델스존과 라벨의 품 안에서 천천히 사유해 보면 될 일이다. 다행히 연주 영상이 남아있으니, 선율 안에서 손가락을 노니는 재미를 다시 느껴도 좋겠다. 어차피 길게 붙잡고 써 내려갈 ‘무언가’들이 아닌가. 그냥 피워지는 대로 흘려보자. 악장별 구분 같은 건, 오늘만큼은 모르도록 하겠다.

 

 

 

 

펠릭스 멘델스존 - 현악 4중주 제1번 E♭ 장조, 작품번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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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첫 음에서 바로 느껴졌다. 연두빛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 아,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이런 소리다. 첫 마디에 어둠이 저물고, 이어지는 바람에 노곤함을 잊는다. 내질러도 좋지만, 길게 천천히 당겨 오는 바이올린과 미소 한 자락.


사람마다 클래식을 향유하는 방식이 제각각이겠지만, 나의 경우엔 어떤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실마리를 죽 나열하기도 하고, 그냥 멍하니 지켜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결국 시작점에 모든 게 결정된다. 이 음악을 내 시야에 담아 둘 것인지 여부가 하나의 숨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은 연주가들의 소리에 쿨톤과 웜톤이 있다는 걸 아시는가? 어찌나 다들 제각각이신지, 하루마다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일단 나는 그 색감 차이를 현악기, 특히 바이올린 안에서 가장 선명히 느낀다.


마음에 길게 각인되는 소리는 무엇이던가. 일단—쿨톤이어야 한다. 웜톤이라면 조금 다르다. 그 안에 내 인생보다 훨씬 깊고 넓은 파도를 지나온 흔적이 응축되어 있거나, 그 소리 자체가 나를 설득시켜야 한다.


지나치게 능숙하고 수월하면, 오히려 가슴이 콩콩 뛰지 않는다. 소리에는 반드시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 그렇다고 인공지능보다 덜 완벽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건 첫 활과 끝 활 사이에서 ‘그 사람’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음을 통해 당신이 누구인지 마주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당신을 만나러 온 시간의 이유를 스스로 내보여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좋다’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클래식 연주가들만큼 ‘소리’로 자신을 드러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면모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음’이 어떤 색을 띠고, 얼마나 악기와 깊이 공명해 왔는지가 침묵 속에서 가장 선명히 드러난다.


그 재미를 알고 나니 클래식을 듣는 과정은 내게 꽤 복잡한 상호작용이 되었다. 여행을 가는 이유—일상을 벗어나 새로움을 느끼고, 예기치 못한 상황을 돌파하며 성취감을 얻고, 시야를 확장하려는 마음—와 비슷하다.


세계를 조금이라도 넓게 이해하고 싶다면, 더 내밀한 영역으로 파고들어 끊임없이 ‘무언가’와 대화해야 한다. 타인의 조언도 좋지만, 나는 고요함을 전제로 하는 영역들—책, 언어 공부, 글쓰기, 그리고 클래식—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다. 이 고전들은 내 쓸데없는 번뇌보다 짧고, 누구보다 오래 호흡을 맞춰 주는 페이스메이커 같다.


굳이 말을 얹지 않고, 소설책 밑줄만 길게 그어 둔다. 네가 무엇을 얹어 낼지,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영역을 만든다. 정답은 없다. 답이 있다고 명명하는 순간, 되레 틀에 갇힌 판단이 되기 쉽다.


내 안의 것을 펼쳐 내며, 아무도 건들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의 기틀을 다진다. 그 길목을 거닐다 보면 살짝씩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런 걸 좋아하네? 다른 것들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클래식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사람과 빛, 짙푸른 소리와 미소에 약하다는 걸. 어쩌면 다 소용없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현듯 웃게 되는 건, 연주가들이 소리 속에서 건네는 어떤 표정들 때문이다. 그 몇 장면이 오래 남아,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나를 비춘다.


기쁨의 기억을 누적하는 재미를 아시는가? 산책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유튜브를 보다가도 한 줄의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무슨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그런 것까지 경험하냐 싶겠지만, 그 ‘재미’들을 직접 주워냈기 때문에 내 안에 별로 박힌 것뿐이다.


내가 ‘빛’이 난다 하였으니 그들이 ‘빛’이 되었고, ‘먹먹한 청록의 기색을 띤 생명’이 된 것이다. 사실, 조명을 비춘 방향대로 앞길이 그어지기 마련이다. 무엇을 할지도 스스로 선택해야 화살표를 조정할 수 있다.


나라고 매 공연마다 무엇을 느끼겠구나, 배우겠구나—미리 예견할 수 있겠는가? 매번 어려운 길이다. 당장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까 두렵고, 공연 10분 전엔 매일같이 떨린다. 당장 어떤 말을 쓰게 될지조차 감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말미에는 그냥 ‘믿는’ 쪽으로 결심을 굳힌다. 지나온 과거의 내가 결국 써냈던 문장들을 떠올리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뻗어내는 길목을 묵묵히 뒤따르면 된다. 나 혼자 버려지더라도, 너무 낯설어 주저앉더라도, 그게 틀린 답이 되진 않는다. 그래서 좋은 거다.


이 안에는 ‘부정’이 없다. 내가 그렇게 느꼈으면 그런 것이고,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맞다. 콩쿠르나 평가는 어쩔 수 없는 경쟁 사회의 과정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제대로’라는 틀조차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보다 빠르게 타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 아니던가. 나는 누가 더 훌륭하고 기교적으로 뛰어난지를 판단할 재간이 없다. 첫 물음 자체가 “당신은 누구십니까”인데, 누가 더 공손하게 혹은 힙하게 인사했는지로 무엇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냥—나는 내가 듣는 것을 매번 ‘긍정’한다. 그러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 한 줄을 그어 두는 것만으로도 이 장르에 꽤 많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걸 알고 나니 이렇게 바빠진 것이다. (공연을 한 달에 몇 개나 보는 거냐)


지금만 봐도 그렇다. 멘델스존 현악 4중주 1번을 들으며 내가 어디까지 사유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목격한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이런 주제로 오프라인에서 토론을 벌일 자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침대 위 곰인형 하나를 끌어안고, 노트북으로 현악 4중주 영상을 틀어 놓은 채 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일 뿐이다. 마음이 편하니 이어지는 얘기는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나를 ‘부정’한다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공간 안에서, 좋아하는 부분을 마음 편히 귓가에 얹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고통받는 이유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현재라 함은 멀리 있지 않다. 정말—지금 ‘당장’ 안에서만 생각을 붙들어 두는 것.


내일의 과업, 과거의 상처, 조금 전의 말 한마디를 잠시 내려놓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선풍기의 프로펠러 소리와 네모난 키보드를 타닥이는 손가락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는 이 손가락들이 내 마음을 인출하고 있다. 그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만, 시선을 주어야 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꽤 조용하고, 의외로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땐 말 한마디 없이 춤추고, 감정의 파도를 타는 서정적인 소리들을 들어야 한다. 서정—주로 예술 작품에서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려 내는 것. 내어 오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장 넓고 깊은 파동으로 펼쳐낼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 싶겠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천재들이 너무 좋은 편지지를 잔뜩 준비해 두었다. 우리는 악보라는 해설지 없이도 편하게 듣기만 하면 된다. 처음엔 도대체 이걸 왜 듣겠나 싶겠지만, 듣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되거나, 눈물이 고이거나,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어떤 마음이 들어서일까. 글쎄, 각자의 영역이라 쉽게 단정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들은 한 줄의 제목 안에 담긴 몇 악장에서 ‘공감’을 건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너를 통해 나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연주가들 또한 자신의 손안에 있는 무언가를 악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게 아니던가. 그래, 우리 모두는 결국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됐다,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이래나저래나 멘델스존의 바이올린과 짙푸름이 만나면 나에겐 너무 큰 ‘느린 안도’가 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그려 놓은 까만 것들은 내 관자놀이의 따끔함과 마음속 새카만 것들을 하나씩 연두빛으로 물들인다.


색이 입혀진 감정들은 눈 안에 가득 고여, 아래로 타고 흘러내린다. 그날도 그러했다. 하나씩 쌓인 것이 결국 두 갈래로 해소된다. 내보여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흘려보내야지. 별 수 있겠나.

 

 

모리스 라벨 - 현악 4중주 F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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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 저마다 다른 꽃잎을 얹어 주듯, 라벨은 낯선 색채를 건넨다. 기다란 고단함이 해소되고 나니, 온통 낯선 것들로 가득하다.


생각해 보라. 언제 마지막으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던가? 고등학교 시절이 아니고서야, 물감 얼룩진 팔레트를 펼쳐 본 적이 있었던가? 태블릿 PC 안에서나 물웅덩이를 손쉽게 그려냈지, 이렇게 시야 밖에서 긴 그림을 그리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살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사실 그냥 바라만 봐도 되는 게임이다. 악기 네 개가 노니며 남기는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뿐. 여덟 개의 손과 네 개의 숨이 짧게, 그리고 아래로 패여 내는 악장을 듣다 보면, 모든 판단이 무의미해진다. 그냥—지문 아래 나타난 자연물을 따라가라. 생각을 비워라. 얻으려 들지 말고, 따라가든지, 아니면 그림을 그리든지.


아무 생각 없이 듣다 보면 얇은 실선들이 하나씩 둥근 춤을 춘다. 비올라는 또 다른 원을 그려 또 다른 재미를 만든다. 우아하고 농밀한 기색이 가득한 악장이 찾아왔다. 이쯤 되니 이 악기들이 하프처럼 들린다.


손으로 현을 튕겨 냈는데, 어떻게 이렇게 아래로 둥근 소리가 퉁—하고 울리는 걸까. 들을 때마다 좋고, 들을 때마다 신기하다. 어둠의 기운을 머금은 하프들이 서로 다른 춤을 추듯, 소리의 선명도가 점점 올라간다.


얇고 시리게 재잘거리는 제1바이올린이 좋다. 푸르지 않았다면 다시 들을 일도 없었을 텐데. 


첼로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이쯤 되면 라벨이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 잘 모르겠다. 인영일까. 풍경일까, 마음일까. 예전에는 그림 그리기가 선과 채색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잘 아는 언어로 키보드 위에서 그려 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글을 쓴다는 것보다, 오히려 글을 그어 내고 있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를 드러내기보다, 내 생각 언저리의 실선 하나를 길게 뽑아내는 일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뭐든 다 수단인 것이다. 결국 내 내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 사람들의 소리를 훔쳐 오는 것. 그것도 라벨의 것으로. 네 가지 색깔로만 이루어진.


요상하고 묘하지만 자꾸 시선이 머무는, 몰입감의 짙은 안갯빛. 치밀해지되 과밀하지 않고, 내적이되 자유를 잃지 않으며, 자연히 흐르게 두되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그림의 형태가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한다.


역시 멘델스존에서 깊은 수렁을 지나온 탓일까. 라벨에서는 한층 마음이 가벼워진다. 자유롭게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기반이 준비된 듯했다. 점차 빨라지는 속도감과 짹짹거림이 어우러지며, 이 날의 곡들이 그렇게 끝났다. 네 개의 악기가 남기고 간 흔적은 오래도록 귓가를 맴돌았다. 

 

이든 콰르텟의 소리는 정갈하면서도 섬세했다. 멘델스존에서는 네 악기가 각자 다른 결을 품은 채 자연스럽게 얽혔고, 라벨에서는 피치카토가 살아있는 색채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5. 여의도역 -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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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공연이 끝나고, 어제 반갑게 인사했던 연주가들과 짧게나마 안부를 한 번 더 나눌 수 있었다. 정확히 내 대각선 앞에서 사이좋게 공연을 관람하시던 두 중년 여성분들이 무대로 날리던 큰 하트를 기억한다. 얼마나 귀여우시던지!


음악이란 건 나이를 불문하고 한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 그래서 좋은 거 아니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한때 어린아이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어리숙하다. 익숙해짐과 나태함, 포기와 내려놓음을 성숙이라 착각하고, 동요하는 스스로를 지쳤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곁에 두어야 한다. 그날만 해도 그랬다—아주 길고 성가신 피로감에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걷지 않았던가.


9시 이후, 내 흰자위에는 어느새 생기가 가득했다. 막 연두빛으로 물든 참이 아니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좋았는지 말을 전하진 못했지만, 시선과 몇 번의 악수만으로도 진심을 대신했다. 


방금 들은 소리를 내 안에 흡수했는데, 이 과정을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냥 “잘 들었다”라고 말할 수밖에! 아니, 생각해 보면 ‘들었다’가 아니라 ‘잘 받았다’가 더 맞겠다.


그냥, 이렇게 잠깐이라도 웃을 시간, 멍하니 울어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권태가 몰려올 때마다 그것들을 잠시 잊게 해주는 ‘기억’들을 인생 틈틈이 끼워 넣는 것이다. 그래야 기쁨을 온전히 기뻐하고, 슬픔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공연이 끝나고 동행과 함께 여의도역을 천천히 걸었다. 밤공기가 괜찮았다. 요즘처럼 변수가 많고 예기치 못한 날씨에 비하면, 충분히 감사할 만한 습도였다. 모든 게 저물어 가는 시간이라 자연스레 하품이 밀려왔지만, 그날의 공연 덕분에 말 뒤에 괄호를 하나 덧붙일 수 있었다.


“아—피곤해 (근데 좋았어).”

그래, 이 재미지.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소리가 지나간 자리엔 묘하게 환한 기운이 남았다.

다음 연두빛을 기다리며, 안녕—,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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