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모든 관계는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기에 덧없다. 특별히 나쁜 감정이 없어도 상황과 때에 따라 멀어지기도 하고, 그사이에 또 다른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인연의 유입과 떠나감을 반복하다 보면 헤어진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한 번쯤은 더 만나도 좋을 사람.


다만 각자가 떠올리는 사람은 삶의 방향과 때에 따라 언제는 전자였다가, 언제는 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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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의 ‘기하’에게 ‘재하’와 ‘재하 어머니’는 그런 존재다. 이 작품은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이 사 년 남짓 잠시 가족으로 지냈던 시절과 그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펼쳐지는 인물의 상황과 심정을 다룬다. ‘기하 아버지’와 재하 어머니의 만남은 기하와 재하에게 온전한 가족 구성원을 만들어 주었지만, 완전한 혈연이 아니라는 점이 생각보다 크게 다가온다. 기하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잘 따르는 기하보다 8살 어린 재하와 달리, 기하는 재하 어머니의 갖은 노력에도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기하와 친해지기 위해 슬며시 팔짱을 끼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비워진 친모의 빈자리에 공감하는 말을 건네봐도, 대학에 입학한 후 기숙사 생활을 하는 기하를 위해 여러 반찬거리를 건네는 재하 어머니에게 기하는 늘 퉁명스럽고 차갑다. 팔짱 낀 팔을 휙 밀쳐버리고 정성이 담긴 반찬을 받지 않고, 기하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재하 어머니에게 가족인 척하며 사는 게 불편하다는 말을 내뱉는다. 그래서일까. 가족이라면 당연한 일들이 이들에게는 늘 조심스럽다. 아토피가 심해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재하를 위해 기하가 함께 병원에 가 줄 때면 재하 어머니는 기하에게 언제나 용돈을 챙겨준다. 재하는 치료실 안까지 형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늘 무서움을 숨기고 혼자 치료를 받고 나온다. 치료 이후에도 재하가 기하에게 하는 말들은 진료 소견이나 치료 경과가 아닌, 별 의미 없는 일방적인 대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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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가족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을 유일하게 이어주는 매개체는 ‘DSLR 카메라’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기하 아버지는 필름 카메라를 애용한다. 해가 갈수록 손님이 줄고 적자가 이어져 시류에 맞게 사진관 재정비를 하고 DSLR 카메라를 들이자고 하는 기하의 말에도 아버지는 완고하다. 그런 그가 새로운 카메라를 들이고 포토샵 강좌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재하 모자를 만나고부터다. 함께 한 시간을 오래도록 붙잡아주는 카메라는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웃어야 할 것 같은 순간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재하가 어머니와 단둘이 생활할 때는 사진 한 장 없던 사진첩이 기하 아버지로 인해 그 여백이 하나씩 채워진다. 분명 함께 사진을 찍을 때도 퉁명스러웠던 기하의 모습은 변함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사진을 보면 그 당시의 속내나 내막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날의 평화로운 햇살과 눅진했던 여름 공기가 선선한 바람으로 변해가던 가을에 담겨 있는 한때만이 남는다. 함께 했던 사 년이 지나 기하와 기하 아버지는 곁에 없지만, 재하는 그 사진들을 보며 당시의 나날을 반추한다.


작품에서 사진은 생각보다 서로를 이어주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서른일곱이 된 기하가 재하 모자를 우연히 발견한 건 “재하 반점”이 적힌 간판 아래 서 있는 재하 모자가 담긴 스트리트 뷰다. 무작정 찾아간 그곳에서 서로는 서로를 보며 지나간 흔적을 확인하고 살아온 세월을 공유하지만, 속의 알갱이는 씁쓸하다. 삶은 만만치 않아서 재하 반점은 철거되어 재하는 고베로 떠날 예정이었고 기하는 결혼을 “했었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밝고 붙임성이 좋았던 재하는 지난 시간 우울증을 크게 앓았고, 기하는 하던 일이 끊겨 대리기사 일까지 겸하는 처지가 되었다. 무엇보다 재하 어머니는 갑작스레 돌아가셨고 기하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는 소식을 주고받는다. 


이후 그들은 잠시 빈 시간을 활용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인릉에 간다. 어릴 때 기하 아버지가 재하에게 주었던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지난 시간 함께하지 못한 여백의 틈은 두 사람을 어색하게 만들었지만, 재하는 기하를 찍어주기도, 자신의 사정과 심정을 기하에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혈육은 아니라도 함께 공유한 시간이 있었단 사실만으로도 기하의 존재는 재하에게 컸을 것이다. 어릴 때처럼 시시콜콜 밝은 어조로 이야기하진 않지만, 그 안에 담긴 언어는 별 뜻 없는 말이 아닌 어떻게든 그 시절을 견뎌낸 재하가 느꼈을 외로움과 슬픔이다. 그리고 기하는 그동안 해오지 못한, 어떻게 보면 한 번쯤은 꼭 해주고 싶었을 “잘 지냈니” “보고 싶었어”, “미안해”와 같은 말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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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마지막은 재하의 시점에서 글을 전개하며 마무리한다. 고베에 도착한 재하는 기하가 알려준 번호가 없는 번호라는 사실에 분개했지만, 이내 형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 탓에 형에게 보낼 편지는 가 닿지 않겠지만, 재하는 형이 담긴 사진 뒷면에 편지를 쓰고 오래전 네 명의 가족이 함께 살았던 집 주소를 적는다.

 

 

누가 이 편지를 받을까요.


재하야, 다정히 부르며 이마를 쓸어주는 아버지일까요. 

희고 따뜻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 서서 해바라기를 하는 어머니일까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다 가만히 미소 짓는 형일까요.


 

이 책의 지은이인 성해나 작가는 두 사람이 앞으로 영영 만나지 않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마지막 장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먼 곳에서 서로를 간간이 떠올리고 행복을 빌며 지나간 시간에 아파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고 꼭 해피앤딩이 아니고 영영 만나지 못한다고 새드앤딩이 아닌 것처럼, 어떤 시절이 있었든 재하의 기억 속 세 사람의 모습은 전부 따뜻하고 평화로워서 참 다행이다.  


지나고 나서야 문득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의 상황이 왜 그렇게 흘러갔을지, 그때 그 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다가도 시간이 흘러 그 맥락을, 그 사람의 의중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기하가 조금 더 성장했을 때 재하 모자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땐 너무 어려서 몰랐었던 그들의 마음을, 이를테면 어색하게 팔짱을 끼면서까지 가까워지려 하던 재하 어머니의 손길을, 기하에게 짐짓 호들갑을 떨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재하를, 필름카메라에 대한 애착이 완강하던 아버지가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DSLR 카메라를 들이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었을 무언가를.


지나간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그때 알지 못했던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지만, 작품의 인물들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꿋꿋이 개척해갈 의지를 보인다. 서로의 복을 빌며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어디에 있든 아무도 아프지 않고 행복하길 바란다는 점에서. 모두가 지나간 잔상을 붙들고 힘들어하지 말고 좋았던 기억만 담아 갔으면 한다. 두고 온 여름 안에 들어 있는 서로의 많은 것들이 후회되고 아플지라도 언제나 그랬듯 여름은 매년 돌아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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