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저마다 다른 형태를 지니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다름’이란 때로는 누군가에겐 취약함이 되고야 만다. 그저 나로서 살아갈 뿐인데도, 그것이 곧 약점이 되는 시대. 그러니 좀처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시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된 전시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는 이러한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신체가 지니는 취약함을 당당히 발화한다. 그리고 동시에 고민하며 질문한다. 지금, 이 순간 그런 전시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기울인 몸에 대하여

우리의 몸은 서로 다르다. 다른 몸으로 미술관에 왔다.
다양한 몸이 모이는 미술관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만날 수 있을까?
2025년 5월 16일부터 7월 20일까지 열리는 전시 <기울인 몸들>은 ‘기울인 몸들’, ‘살피는 우리’, ‘다른 몸과 마주보기’라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장애가 있는 몸과 나이든 몸, 병을 앓는 몸 등 인간의 신체는 이토록 다양하다. 그런 다양한 형태의 몸을 환대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전시는 탐구한다.
먼저 1부 ‘기울인 몸들’에서는 특정 신체를 그저 약하다고 여기는 편견들에 맞선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대화 방식을 보여주는 김 크리스틴 선의 <일상의 수어>부터 나와 타인은 연결되어 서로의 보철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음을 전하는 김원영과 정지혜의 <보철(물)로서 움직이기-머신/어포던스/케어>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2부 ‘살피는 우리’는 미술, 건축, 언어, 몸짓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저마다의 몸을 어떻게 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장애인의 시점에서 설계된 도시와 농인을 위해 눈에 띄는 색을 입힌 문지방 등을 보며, 우리의 일상적 공간과 디자인에 대해 다시금 사유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3부 ‘다른 몸과 마주보기’는 시각장애인과 함께 하는 발레 수업이나 노년과 장애인이 연대하는 공연 등 서로 다른 몸들이 함께하는 모임 및 공연을 보여준다.
이처럼 전시에서는 여러 몸을 다룬다. 그리고 여러 점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략 일맥상통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할 것, 다만 그 다름을 취약하다 여기지 않을 것. 특정 신체를 약하게 여기는 행위는 그를 약점이라 치부함과 다름없다. 현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허울 뿐인 동정보다도 모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이다.
모두의 공간
다름을 끌어안고 살아가려는 움직임은 비단 개별 작품에서만 비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제박물관협회는 2022년 개정된 박물관 정의에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라는 과제를 부여했다. 이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모든 방문자를 환영할 수 있는, 즉 ‘접근성’을 갖춘 공간으로 변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시대가 흐른다면, 그 흐름은 분명 어제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할 테니까.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전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여러 실험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그러한 실험을 진행 중인 것이다.

전시장의 초입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바닥에 마련된 점자블록이다. 그곳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관람자를 위한 쉬운 글 전시 설명이 마련되어 있고, 촉지도와 점자 안내도 함께 제공한다. 또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화형 음성 해설이 상시 진행되고 있다. 전시의 도록은 웹(web) 형식으로, 이 역시도 큰 글자와 음성지원, 어두운 화면 등의 방식을 지원한다. 더불어 전시가 개막함과 동시에 누리집 및 전시 안내 앱 내 접근성 페이지가 신설되었다. 모든 관람객이 미술관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그들이 전시장의 접근성을 확대하고자 한 노력의 흔적이다.
과연 지금까지 미술관이 온전히 모두의 공간으로서 존재해 왔을까? 이 질문에 쉽사리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설계되어 왔기에 장애가 있는 이들은 그곳에서 단지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술에는 주인이 없지 않은가. 그 앞에선 모든 이들이 수평적이어야 하고, 우리는 평등 속에서 앞에 놓인 것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런 예술에 닿기 위한 기로에서 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배제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따라서 미술관은 어떤 몸이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미술관, 그리고 예술 공간들의 변화를 응원한다. 문화예술이 모두에게 닿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그날을 염원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