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열기에 취해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른 채 땀만 흘렸는데, 어느새 7월이 끝났단다.
지구가 끓어감에 따라 최근에는 9월까지도 후덥지근한 날씨가 지속된다지만, 여전히 나에게 여름의 정수는 7월과 8월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8월은 늦여름의 유독 뜨거운 열기, 아스팔트 바닥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붉다 못해 빨갛게 타오르는 노을, 귓가를 때리는 매미의 울음소리 등으로 기억된다. 여름을 정리하고 다가올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7월이 온갖 초록이 폭발하는 생동의 달이라면, 8월은 멍하고 뜨겁고 아득한 달이다.
이렇듯 8월이 다양하고도 풍부한 정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인지, 많은 예술 작품이 8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너무 더워 아무것도 하기 싫은 8월에는, 에어컨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예술 작품 속 8월을 함께 바라보는 건 어떨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1998)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둔 어느 여름, 조용히 스며든 사랑을 겪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1998년 개봉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작품은 멜로 영화의 대가로 불리는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으로, 이후 한국 멜로 영화의 정서적 방향을 바꿔놓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서울 변두리의 조용한 사진관을 운영하는 30대 중반의 남자 주인공, 정원(한석규 분)이 있다. 그는 암 투병 중이며, 더 이상 긴 시간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원망하지 않고, 담담하게 일상을 받아들인다. 매일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을 인화하고, 평소처럼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렌즈에 담는다.
어느 날, 주차 단속을 담당하는 여성 다림(심은하 분)이 근무 중 필요에 의해 사진관을 찾으면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나게 된다. 다림은 활기차고 솔직하며, 정원에게 자연스레 말을 걸고 다가간다. 두 사람은 큰 사건 없이도 서서히 가까워지고, 여름날의 따사로운 햇살처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서로에게 물들어간다.
둘은 서로에게 끌리며 가까워지지만, 정원이 갑작스럽게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다림은 그 이유도 모른 채 사진관에 나타나지 않는 정원을 그리워하고 애달파한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지만, 영화 말미에 정원이 세상을 떠난 뒤 겨울이 오고 사진관에 방문한 다림이 진열대에 전시된 자신의 사진을 보며 수줍게 미소 짓는 장면은 잔잔하면서도 깊은 두 사람의 감정선을 보여준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여름, 그중에서도 90년대의 여름이라는 고유한 감성을 화면 위에 절묘하게 포착한 영화다. 필름 카메라, 라디오, 공중전화, 손 편지처럼 지금은 낡았지만, 여전히 따뜻한 아날로그 정서가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다. 특히 다림이 정원을 만나기 위해 사진관 문 앞에 편지를 끼워두고 돌아서는 장면은 지금 시대의 관객에게도 그때 그 시절의 로맨스를 보여주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문학: 『8월은 악마의 달』(애드나 오브라이언, 1965)
『8월은 악마의 달』은 아일랜드 출신 여성 작가 애드나 오브라이언의 작품으로, 한 여성이 휴가차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자신의 욕망과 자아를 마주하는 기록을 다룬다. 이 책은 1965년 출간되었으나 성적 묘사와 신성모독 등의 이유로 판매 및 출판 금지 도서로 지정되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애드나 오브라이언의 대표작인 소녀 삼부작 『시골 소녀들』, 『외로운 소녀』 그리고 『행복한 신부가 된 소녀들』 역시 아일랜드에서 금서로 지정된 바 있다. 『8월은 악마의 달』은 2024년에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하였다.
주인공 엘런은 사랑하는 남자의 선택을 따르며 수동적으로 살아온 인물로, 그와의 결혼생활이 끝난 후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들이 전남편과 캠핑을 떠나고, 홀로 남은 엘런은 즉흥적으로 남프랑스로 여행을 떠난다. 남프랑스의 뜨겁고도 눈부신 풍경은 그녀가 평생 눌러온 욕망과 감정에 균열을 일으킨다. 작품은 엘런이 그곳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성들, 유명 배우와의 하룻밤, 그리고 그날 밤 이후의 후회와 혼란, 자신의 행복을 향한 새로운 갈망을 따라간다. 이 여행은 단순한 일탈이 아닌, 한 여성이 자신을 찾아가는 통과의례처럼 그려지며, 억압된 자아를 해방시키는 강렬한 서사로 완성된다.
이 작품은 여름의 정점, 그 뜨겁고 짙은 공기 속에서 펼쳐진다. 태양과 바다가 일렁이는 계절, 숨 막히는 열기와 주인공의 격동하는 감정이 작품 전반에 짙게 스며 있다. 제목에 등장하는 ‘악마’는 단순한 공포의 상징이 아니라, 강렬한 여름의 감각, 억눌린 욕망의 폭발, 그리고 사회적 도덕에 대한 도전을 함의한다.
『8월은 악마의 달』은 8월이라는 계절의 상징성, 여성의 몸과 자아, 사회적 억압과 해방, 욕망과 모성 사이의 충돌을 섬세하고 솔직하게 묘사한 문제작이다. 여름이 주는 빛과 그림자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이 소설은 뜨겁게 달아오른 한여름의 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간다.
음악: ‘august’ (테일러 스위프트, 2020)
‘august’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cardigan’, ‘august’, ‘betty’로 이어지는 3부작의 곡 중 하나로, 10대의 어린 연인인 베티와 제임스, 그리고 제임스를 짝사랑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august’는 그 이름 없는 소녀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그녀는 여름 한 철 제임스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그 시절의 자신이 사랑에 진심이었다는 걸 되뇐다. 곡의 가사에는 제임스와 소녀가 함께 보낸 여름의 조각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여름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결국 제임스는 본래의 연인 베티에게로 돌아간다. ‘august’는 사랑의 소유가 아닌, 그 순간에 진심이었던 감정의 순수를 이야기한다.
But I can see us lost in the memory
하지만 나는 추억 속에서 헤매는 우리가 보여
August slipped away into a moment in time
8월은 한순간에 지나가 버렸지
맑은 기타 사운드와 섬세한 멜로디, 그리고 테일러 스위프트 특유의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진 이 곡은 여름의 달콤함과 씁쓸함, 그리고 덧없음을 동시에 담아낸다. 여름은 끝났지만, 그 기억은 계속 머무는 듯한 기분. ‘august’는 바로 그 여운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한 곡이다.
미술: 「August in the City」(에드워드 호퍼, 1945)
미국의 유명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유화 작품으로, 제목 그대로 여름 한복판의 8월을 지나고 있는 뉴욕 도시를 묘사한 작품이다. 호퍼의 다른 도시 풍경화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안에서 사람이 느끼는 고립감과 단절감, 외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 특유의 감각적인 색채와 빛의 활용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화면 속에는 햇빛이 내리비는 하얀 벽의 건물과 그 안에서 창가를 바라보며 서 있는 조각상이 눈에 띈다. 따사로운 햇이 들어오는 창밖과 달리, 실내는 다소 어두운 듯 정적에 잠긴 분위기다. 이렇듯 내부와 외부의 대비감이 강조되는 구성은 호퍼 작품의 대표적인 구도로, 개인이 사회 속에서 느끼는 단절감과 내면의 고요한 침잠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실제로 조각상은 인간의 형상을 닮았지만, 생명이 없고 침묵하는 존재로 이 도시의 정지된 시간성과 고립된 정서를 더욱 부각시킨다.
8월의 한낮, 매미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생생한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감각과 매미 소리조차 삼켜지는 듯한 정적을 느끼게 한다. 이는 활기차야 할 도시의 여름을 오히려 정체되고 사색적인 풍경으로 전환며, 관람자로 하여금 도시를 관조하는 시선을 갖게 만든다. 도시라는 공간은 번잡하고 밝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때로 더욱 깊은 고독과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화면 너머로 살짝 보이는 자연의 초록빛은 이러한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강조한다.
〈August in the City〉는 뜨거운 공기 속에 숨어 있는 고요함의 미학을 구현하며, 여름이라는 계절이 존재의 본질적 고독을 들여다보는 심리적 배경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냈던 여름의 한순간을, 내면의 감정이 부유하는 정적인 풍경으로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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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어느새 시작되었다.
한낮의 열기는 여전하지만, 태양이 숨은 후 밤의 공기엔 슬며시 가을 예고편 같은 기운이 감도는 듯도 하다. 휴가는 다녀왔는지, 하루는 조금 덜 더웠는지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시기다.
잠시라도 시끄러운 바깥세상에서 벗어나, 예술 작품 속 8월을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은 여름 보내기다. 어떤 8월은 도시 한복판의 적막이고, 어떤 8월은 여름의 끝자락에서 사랑을 붙잡는 마음이다.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청춘이고, 또 누군가에겐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일 수도 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좋다. 바쁜 일상 틈에서 잠깐의 쉼표처럼, 작품 속 여름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 소개한 작품들이 당신에게 조금은 덜 지루하고 더 시원한 8월을 만들어줄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