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이 두 글자를 마주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본 책을 읽기 이전에는 제목인 '불안'이 미래에 대해 과도히 걱정할 때 생기는 불안을 의미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작가는 '지위'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지위'란 사회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로, 좁은 의미에서는 직업적 신분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의미한다.
p.7
그러한 '지위'에 대한 갈망은 아주 보편적인 '불안'이라는 감정을 낳는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지위를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 지위를 잃을까 불안해하기 마련이기에 누구도 불안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사람들은 '낮은 지위'를 두려워할까? '더 좋은 직업'을 가지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는 마음, 그 아래에는 타인이 나를 무시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아래에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는 모두가 나를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잔인할 만큼 깊이 파고든다.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어두운 감정들에 대하여,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부서져 버리는 마음들에 대하여.
두 번째 사랑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을 크게 둘로 나눈다. 첫 번째는 성적인 사랑이고, 두번째는 바로 '세상이 주는 사랑'이다. 이 두 번째 사랑은 주로 경제적인 의미로 해석되어 속물적 비난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사랑은 성적인 사랑만큼이나 복잡하고, 중요하고, 보편적이라고 알랭은 말한다.
만약 사람들이 오직 생활 필수품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라면, 이는 최저 임금으로도 충분히 영위가 가능하다.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원하는 까닭은 그러한 물질적인 것 이외에도 정서적인 측면의 이유가 자리하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으로부터의 사랑이다. 지위로 인한 돈과 명예와 권력은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사랑받고 있다는 상징이며 장차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으로부터의 사랑이 조건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에 있다. 그래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그들과 사귀고 싶어 다가오는 모든 이들은 그들의 몸을 휘감고 있는 사치스러움에 반하여 그들을 쫓는다. 자신의 가치가 스스로의 진정한 자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것들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기에 늘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알랭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운이 좋아 잠시 아슬아슬하게 손에 쥐고 있는 지위가 본질적 자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아마 어쩌면 그들은 누가 자신의 진정한 친구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파산하지 않는 한에는.
세상이 주는 사랑이라는 허상에 심취한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우리 자신도 늘 그 아래의 꼭두각시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인종차별주의자, 속물근성을 지닌 이들, 외모지상주의자...그리고 우리들 자신. 누군가는 그러한 사람들과 본인을 동일 선상에 두는 것에 반발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자신의 가치에 스스로 확신이 없고, 늘 타인의 시선과 외부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불안하며, 불안한 마음의 표출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가볍게는 존경받는 직업을 가지고자 노력하는 수많은 청년들과 나보다 못한 사람인지를 가늠하고 여러 기준으로 그룹을 가르는 장년들이 있을 테고, 무겁게는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은 극단적인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를 특정 기준안에서 끌어내림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 그토록 애쓰지만, 사실 그것들은 전부 본질적인 자아와는 관련이 없다.
자아(ego)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p.22
알랭의 말대로 우리의 자아는 너무도 연약하다. 어떻게 해야 불완전한 자아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에 핵심은 바로 '분리하기'에 있다. 이때의 분리는 지위와 자아의 분리를 말한다. 앞에서부터 계속해서 말했듯이 당신의 지위는 당신이라는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지위와 자아를 동일시 하는 순간, 바로 그 모든 불안과 고통이 따라온다. 당신이 어떤 지위에 있든, 후에 어떤 지위를 지니게 되든 간에, 당신의 자아는 늘 단단히 바로 서야 한다. 불안에 떨며 자신보다 못 한 사람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비록 사회적 지위는 평가당하더라도 당신의 비난이 내 자아에는 결코 와닿지 못할 것이라는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진정한 자기 확신은,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스스로만이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값진 것이다.
지위와 자아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당신은 '가치' 또한 지위의 영역이 아닌 자아의 영역임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사회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했느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아가 빛나는 것에서 온다. 타인을 한결같이 존중하고 스스로를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사람의 자아는 참으로 가치있다. 그 외에 돈과 명예와 권력은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올려줄 수 없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불안>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이 하나 있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1818년에 그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특유의 구도적인 느낌 때문에 번뇌가 생길 때면 한 번씩 찾아보곤 한다. 그림 속 남성의 뒷모습은 위풍당당해 보이기도 하고, 자욱한 안개에 막막함을 느끼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앞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를 알 수 없어, 더욱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다. 그래서 작품을 감상하는 때마다 다른 상황을 대입하며 그림을 쳐다보곤 하는데, 이번에 <불안>을 읽고 나서 본 이 그림은 희미한 세상 속에서 흔들림 없는 자아를 찾고자 결심한 남성의 굳건한 뒷모습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그림 속 남성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걸음의 이유가 타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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