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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를 가졌다는 거야, 올리버 - 연극 <프라이드(P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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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의 연극 <프라이드>가 2025년 3월 29일부터 6월 22일까지 예스24 아트원 2관(구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되었다. <프라이드>는 영국 작가 알렉시 캠벨의 희곡을 2008년 연극화한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지이선 작가의 각색과 김수빈 번역, 김동연 연출의 협력으로 2014년 라이선스 초연되었다. <프라이드>는 1958년과 2008년이라는 분할된 시간선을 넘나들며 필립과 올리버, 실비아와 다양한 역할을 맡는 ‘남자’가 극을 진행해 나간다. 1958년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필립과 필립을 사랑하는 동화작가 올리버의 갈등이 주를 이루고, 파국을 맞이한 그들의 결말 속에서 필립은 전환 치료를 받고 필립의 아내 실비아는 필립을 위해 떠나게 된다. 동성애자 민권 담론에 대해 논의가 활발해진 2008년은 서로 연인 사이인 필립과 올리버는 계속해서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올리버로 인해 지속적으로 갈등하지만, 친구 실비아의 도움으로 프라이드 행진에 참여하게 된다.

 

1958년의 필립, 올리버, 실비아와 2008년의 필립, 올리버, 실비아는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2008년의 현실에 1958년의 해결되지 못한 갈등과 불화(‘잠 못 드는 밤’)의 결과가 모종의 알 수 없는 루트(‘역사’)를 통해 일종의 ‘유산’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하게 만든다. <프라이드>의 이러한 설정은 유사한 설정과 주제를 가진 연극 <와이프>를 연상시키는데, 여성과 퀴어 인권의 역사를 계보화하는 것이 주된 테마인 <와이프>에서는 다른 시대 속에 같은 이름의 인물(수잔나, 데이지)이 등장하고 각 시대 속 인물들은 (언뜻보면 퀴어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혈연’과 ‘대(代)’로 이어지고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탬버린과 타란텔라 등의 요소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반면 <프라이드> 속 두 시대의 연결은 ‘목소리’라는 신비로운 암시에서 머무르며, 소재를 통한 연결 역시 직접적 연결 대신 은유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2008년 등장인물의 대사에서 이야기되는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한 노인 두 명이 파국으로 끝난 1958년의 필립과 올리버일 가능성 역시도 확답을 주지 않은 채 관객의 상상력에 맡길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속 1958년은 퀴어 민권 담론에서의 성공적인 유산이라기보다, 실패의 역사로 느껴진다.

 

법학자이자 오픈리 게이인 켄지 요시노는 『커버링』에서 소수자가 주류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자신의 소수자성을 숨기는 ‘커버링’을 수행해야 함을 밝히고 성소수자 및 인종주의 철폐의 역사와 연관시켰다. 그는 소수자 정체성 집단을 향한 사회적 억압을 ‘전환’, ‘패싱’, ‘커버링’으로 세분화하면서 개인적 회고와 판례, 역사적 사건들을 엮어 제시했다. 동성애자 민권 운동을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로 바뀌는 ‘전환’과 이성애자인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패싱’, 그리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굳이 과시하지 않는 ‘커버링’, 이처럼 소수자의 사회로의 ‘동화’를 위한 사회적 억압이라고 할 수 있는 ‘전환’과 ‘패싱’, ‘커버링’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958년도가 자기 자신의 성소수자 정체성 자체를 드러낼 수도 없고, 필립이 자기 자신을 부정한 끝에 스스로 ‘전환 치료’를 받게 만들었던 시대라면 2008년은 커버링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민권 담론이 진전하며 동화의 압박을 받는 상황 속에서 퀴어 시민들은 조건부로 사회에 통합되며, 여전히 자신을 타자화하는 주류 사회에 끈질기게 저항하거나 제도와 협상하고 있다. 2막에서 게이의 삶을 주제로 잡지를 만들려는 편집장이 올리버에게 보이는 묘한 타자화 및 상업적 대상화의 태도와 HIV/AIDS로 죽었다는 자신의 삼촌과의 경험을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존중을 느낀 그(편집장)의 경험은 기묘하게 공존하며 현재의 성소수자 민권이 가시화되면서 발생하는 다양하고 이중적인 단면들이 노출된다. 필립과 올리버는 ‘성 중독’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올리버의 지속되는 ‘바람기’를 두고 갈등하며, 그 속에서 퀴어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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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소수자 민권 담론의 계보와 역사를 고려할 때,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생략된 50년의 공백 속의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부분적인 요소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1958년의 필립이 올리버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것을 강요하며, ‘침묵은 당신을 살릴 것’이라고 할 때, 그에 대한 답으로 ‘침묵은 자기 자신마저 죽일 것’이라고 말하는 올리버의 말은 20세기 말 HIV/AIDS의 유행과 레이건 정부의 방조 속에서 탄생한 HIV/AIDS 인권 단체 액트 업(Act Up)의 구호, ‘침묵 = 죽음’이 연상된다. 사회에 의해 강요된 침묵은 소수자 개인에게도 체화되어 스스로를 좀먹는다는 것, 1958년의 올리버의 대사는 단순히 1958년의 필립의 운명뿐만 아니라 1969년의 스톤월 항쟁이라는 투쟁의 역사와 그 이후 발생한 HIV/AIDS 속 죽어가던 소수자들의 삶의 역사마저 겨냥한 ‘예언’이 된다. 퀴어 인권의 역사는 1958년 파국을 맞이한 필립과 올리버의 모습이 그러하듯 기존의 ‘실패’를 자양분 삼아 발전했고, 그러한 ‘실패한 삶’ 속에서 퀴어의 비규범적인 존재론적 가능성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프라이드>가 영국에서 초연되었던 2008년 역시 2025년인 현재의 시점에서는 17년이 지난 이야기이며, 한국에서 라이선스 초연이 올라온 이후로는 11년의 시간이 흘렀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월가 점령 시위가 발생한 2008년이 ‘현재’, 즉 이 연극이 작성된 시점이라는 것은 여러모로 교묘한데, 그로부터 또 시간이 지나며 신보수주의의 백래시를 겪고 있는 현재 지금 퀴어 민권 담론은 새로운 전선과 마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2008년에서 나타나는 여러 주제들과 연관되기도 하는데, 올리버에게 지친 필립과 끊임없이 성적 상대를 찾아다니는 올리버의 갈등 속 나치 제복 코스프레를 한 사람에게 흥분하는 쾌락주의자 올리버의 모습은 비규범적 섹슈얼리티 실천을 수행하는 퀴어한 존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올리버가 마주한 나치 제복을 입은 성노동자(‘남자’ 역 배우가 연기) 대사에서 나타나는 인격과 ‘자긍심’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필립이 언급하는 것처럼 나치와 유대인의 역사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상황은 현재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비인간화하는 통치 체제와 주류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며, 연극은 그 속에서 단순히 ‘정체성 정치’의 주체로만 개념화할 수 없는 퀴어와 다른 소수자 집단 간의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2008년 만들어진 <프라이드>의 이러한 낙관적 전망이 드러나는 부분은 실제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전쟁이 발생하고 올랜도 총기 난사 사태 등 혐오 범죄가 다시 주된 이슈로 떠오른 지금과는 어느 정도의 시차가 느껴지면서, 동시에 다시 극우화되고 있는 현재의 사태에 대한 기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낡은 극’이라는 비평적 평가 속에서 퇴보와 진보를 거듭하는 사회의 두 가지 상반되는 힘 사이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전형적인 ‘팩핵’(fag-hag, 게이와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이성애자 여성, 경멸적인 맥락으로 쓰이기도 한다)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실비아는 1958년과 2008년 모두에서 사실상 그 둘을 이어주는 ‘앨라이’의 역할을 하는데, 그러한 활용 자체가 평면적인 것은 아닌지에 관해서도 비평적 시선을 던져볼 수 있다. 1958년과 2008년이라는 두 가지 시간선만을 활용해 진보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불가피하게 경유하게 되는 <프라이드>는 ‘현재’인 2024년(재연) 시점에서 ‘제도화된’ 페미니즘 담론과 퀴어(성) 담론 내부의 시스젠더 게이 헤게모니의 충돌과 역설적으로 그 충돌 속에서 가능해지는 연대를 동시에 다루었던 연극 <와이프>와 구분된다. 하지만 <프라이드>는 동시에 퀴어 연극 텍스트를 다룸에 있어서 영미권의 퀴어 민권 담론의 변화와 계보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에 그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역사적’ 텍스트이며, 그 ‘시차’에서 나타나는 이슈와 사건 역시 해소되지 못한 채 2025년까지 잔존하고 있다. <프라이드>는 소수자 담론이 체제에 포섭되고 있는 지금 퀴어 연극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할 덕목과 미덕의 조건을 가진 작품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낡을 수 없는 극이 된다. 적어도 여전히 혐오를 정치의 동력으로 삼는 한국에서는.

 

* <프라이드>를 이루는 여러 문화적 모티프들도 주목할만하다. 작품 내에 필립의 레코드 판을 포함하여 쓰이는 클래식 음악은 동성애자로 알려진 차이코프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속 오로라의 환영을 본 왕자가 라일락 요정과 함께 성으로 향하는 장면에 쓰이는 반주)와 <녹턴(야상곡)> C#단조를 발췌한 것이고, 그 외에도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있는’ 모리스 라벨과 생상스의 음악이 쓰였다. 이러한 배경음악을 작곡한 이들이 성소수자라는 것이 2막에서 편집장과 올리버의 대사에서 작곡가들의 성적 지향에 대한 대사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아폴론의 신탁을 듣는 장소), (아폴론의 상징물이기도 한) 돌고래, 비 같은 요소를 통해 상징으로 활용하거나 1958년과 2008년을 작품 내에서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

 

 

 

안녕, 이제부터 우리는 긴 여정을 시작할 거예요 - 연극 <킬 미 나우(Kill me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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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의 연극 <킬 미 나우>가 충무아트센터 블랙에서 2025년 6월 6일부터 8월 17일까지 공연된다. 2014년 캐나다 극작 브래드 프레이저(Brad Fraser)의 원작을 지이선 작가의 각색과 오경택 연출의 손을 거쳐 2016년 라이선스 초연을 올린 이후, 2019년 3연 이후 5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킬 미 나우>는 염색체 이상(클라인펠터 증후군)으로 장애를 가진 아이 조이 스터디를 작가인 아버지 제이크 스터디가 양육하면서 발생하는 일을 담은 이야기다. 두 명 외에도 제이크의 동생 트와일라, 제이크와 내연 관계에 있는 유부녀 로빈, 조이와 친한 ‘경증 지체장애’(태아 알코올 증후군)가 있는 라우디를 포함해 총 5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이 연극은 장애/질병이라는 메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성, 안락사(존엄사), 독립이라는 주제를 엮어 존엄성, 취약성이라는 인간 공통의 문제에 가 닿는다.

 

현대 사회에서 장애가 마주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돌봄과 취약성의 문제를 다루며, 이 연극은 논쟁적인 부분을 숨기지 않는다, 사춘기가 된 조이의 자위를 아버지 제이크가 도와주면서도 아동학대로 잡혀갈까봐 걱정을 한다거나, 제이크가 척추 질환을 앓으면서 조이를 위한 활동지원사가 그의 자위를 도와주는 ‘결론’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단순히 ‘불편함’ 자체를 원하지 않는 현재의 시대정신과는 전면적으로 불화하는 ‘극적 현실’이자 ‘재현’이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담론은 점점 활발해지고 있지만, 공공성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는 시대 현실 속에서 담론이 ‘오역’, ‘오독’, ‘오염’되며 공회전을 반복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킬 미 나우>는 마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의 형상이 그러하듯 ‘착한 장애인’, ‘피해주지 않고 유능한 장애인’처럼 자신의 구미에 맞는(주류 사회 규범에 부합하는) 장애인의 모습만 취사선택하는 주류 사회의 시선을 배반하며 깎이지 않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제도와 갈등하고, 끈질기게 협상해야 하는 운명이 소수자의 삶이다. 극 속에서 복지 제도와 보험(금) 문제는 그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이자 (경제적) ‘생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아픔과 ‘불편함’, 죽음의 타이밍마저 예상하고 ‘계산’해야만 하는 삶에 처하게 된다. 또한 조이를 키우는 제이크와 이를 돕는 고모 트와일라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 뿐만 아니라 원가족이 없고 단절되어 시설과 센터에서 생계를 해결했던 라우디의 이야기가 그렇듯, 돌봄을 ‘사사화’(privatization)하면서 동시에 통치의 대상으로 관리하는 근대적 인구 관리 제도가 가진 장애 인권 담론에 있어서의 한계가 명백하지만, 물리적, 정신적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제도마저 악착같이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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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가족이 내적으로 겪는 갈등과 싸움의 과정 역시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친구 라우디와 나가서 같이 살고 싶어하는 조이와 말다툼이 붙은 제이크는 넘어져서 병원에 실려가고, 그동안 단순한 통증으로 넘겨 왔던 자신의 척추 질환을 발견하게 되고 그 이후 고강도의 진통제로 버티며 삶을 이어간다. 등장인물 간의 의견 차이와 솔직한 속마음, 각자 가지고 있는 그늘은 작품 내에서 긴장과 갈등을 생성하며 작품을 하이라이트로 이끈다. 갈등을 해결하고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트와일라와 라우디의 러브라인과 제이크의 집을 찾아와 조이를 만난 로빈의 이야기를 거치며 5명의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더욱 더 의존하게 된다. 최신의 장애인 인권 운동에서는 독립적인 근대적 개인을 전제하는(그리고 다소 비장애중심주의적으로 개념화되는) ‘자립’이라는 가치를 넘어 공동체 내에서의 ‘연립’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는데, 왜 이 가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지를 쉽게 설명하는 듯한 장면이다.

 

이 작품은 탄생 당시부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공연 이후로 발생한 비당사자의 장애 재현 이슈와 실제 장애인인 가족 구성원을 둔 이들의 상반된 평가는 연극 속 장애 재현에 있어서 여전한 한계나 환경과 여건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무엇이 왜 불가피한 것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또한 부성과 혈연, 독립이라는 코드는 이 작품을 단순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도식으로 설명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종종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듣게 하는 ‘신파’ 코드라는 평가 역시 이 작품에 대한 비평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이 극은 더욱 다양한 맥락을 연상시킨다. 2019년 3연을 거친 이후 이 공연이 올라오지 않았던 2020년대 초, 한국에서 장애 인권 담론은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전국장애인철폐연대(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은 그러한 탈시설, 자립/연립이라는 주제를 구체화한 하나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장애 아동/청소년이 학교 안과 밖에서 겪는 일들은 2023년 웹툰 작가 주호민의 아들과 학교의 특수 교사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을 연상시켰는데, 사건이 언론에 의해 ‘이슈’화되면서 장애 아동의 교육권과 교사의 노동권의 동시적인 공존에 관한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공론장을 열긴 커녕 특정 개인에 대한 소모적 비난과 사이버 불링으로 종결된 한국 사회의 현실은 <킬 미 나우> 속 ‘현실’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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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마지막은 조이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당일, 자신의 존엄성을 위해, 그리고 더 이상의 고통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제이크가 자신이 종종 조이를 목욕시켜주던 욕조에서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다. 성년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는 졸업식이라는 의례가 주는 의미심장한 상징성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아들 조이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큰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다는 제이크의 소망은 납득가능한 것이다. 동생 트와일라와 애인 로빈은 제이크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울먹이고, 라우디 역시 조이를 염려한다. 결국 제이크는 약을 먹고 욕조 안에서 조이의 시선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공연의 커튼콜은 독특하다. 퇴장했던 트와일라와 로빈, 라우디는 다시 무대로 등장하지만 무대 위에 있던 제이크와 조이는 몸이 물에 젖은 상태로, 극적 현실과 현실 사이에 경계선을 긋지 않은 채 그대로 커튼콜을 진행한다. 이러한 커튼콜의 모습처럼, 질문을 던지기 위한 텍스트라는 연극의 본질에서 기인한 ‘불편함’을 공연장을 나오고 나서도 관객들이 모두 자신의 삶에 가져가길 바란다.

 

 

* 이 기사에 사용된 모든 사진은 연극열전 인스타그램(@thebestplay2017)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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